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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황태닭가슴살애호박당근수프’를 만들었다

등록 2018-01-05 19:49수정 2018-01-05 19:59

[토요판]박현철의 아직 안 키우냥
14. 처음 만든 자연식

빛의 속도로 황태닭가슴살애호박당근수프를 먹고 있는 라미와 보들이.
빛의 속도로 황태닭가슴살애호박당근수프를 먹고 있는 라미와 보들이.

아는 만큼 괴롭다. 우연히 어느 기사를 통해 책 ‘개·고양이 사료의 진실’(책공장더불어)을 알게 됐고, 읽게 됐다. 캐나다에 사는 반려동물 사료 전문가가 쓴 책이다. 개와 고양이 사료가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폭로한 책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나 혼자 괴로울 순 없다.)

책의 내용은 충격적인데 결론은 간단하다. “사료를 먹(이)지 말라.” “개와 고양이 밥도 만들어 먹이자.”

다 맞는 얘긴데,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다. 나 역시 삼시세끼를 거의 밖에서 사먹는다. 라미와 보들이가 온 뒤론 더 심해졌다. 냄새 나는 음식들을 준비하는 것도, 느긋하게 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사료를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 일주일에 한두번, 주말엔 그래도 시간이 넉넉하니까 직접 만들어봐야겠다 생각했다. 레시피가 적힌 책이나 선배 집사들의 경험담을 보니 사람이 먹는, 그래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건강한 재료 중에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았다. 그중 라미와 보들이가 잘 먹을 만한 것들을 동네 슈퍼에서 샀다.

육식동물인 고양이에게도 섬유질은 필요한 영양소라고 했다. 소화를 돕고 털도 건강해진다고. 다만 그래도 육식동물이니까 닭고기와 채소의 비율을 8 대 2 정도로 맞췄다. 아마도 그럴 일 없겠지만, 거부할지도 몰라 냥이들이 환장하는 황태채로 육수를 냈다.

황태를 건져 식히면서 닭가슴살과 애호박, 당근을 적당하게 잘라 육수에 끓였다. 끓는 걸 기다리는 동안 사진을 찍어 주변 사람들에게 보냈더니 초딩 딸을 둔 후배는 “우리 딸보다 삶의 질이 높다”며 부러워했다.

당근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끓인 뒤 건져내 찬물에 식혔다. 사람이 먹는 볶음밥 양념 크기보다 더 작게 재료들을 칼로 다졌다. 이때부터 또 다른 고비다. 냄새를 맡은 라미가 싱크대를 떠나지 않는다. 내려놓으면 올라오고, 내려놓으면 올라오고… 참을 인(忍)을 이마에 새기면서 작업을 계속했다.

다진 재료에 육수를 부어 그릇에 담았다. 만들어 놓고 보니 정말 간단했다. 사람 음식처럼 갖은 양념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라미, 보들이의 첫 자연식의 이름도 간단하게 지었다. ‘황태닭가슴살애호박당근수프’.

드디어 운명의 시각…이랄 것도 없이 라미는 싱크대로 뛰어올라와 빨리 내놓으라며 울어댔고 라미 목소리를 들은 보들이도 마루에서 찡찡거렸다. 두 냥이는 습식캔을 먹는 속도보다 빠르게 생애 최초의 자연식을 한 그릇씩 거뜬히 비웠다. 태어나고 1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만들기 어렵지도 않고 이렇게 잘 먹는데, 좀더 일찍부터 해줄걸 하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느껴졌다.

매일같이 이렇게 먹으면 참 좋겠지만 일주일에 한두번 특식을 먹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다(그래야 한다). 대신 같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좀 찾아보기로 했다. 예를 들어 고구마 같은 것들.(사실 난 고구마를 안 좋아한다. 평생 한번도 내 돈 주고 사먹은 적이 없다.) ‘개, 고양이가 행복한 세상은 사람들도 행복한 세상’이란 생각을 했는데, 하나 추가됐다. 개, 고양이에게 건강한 음식은 사람에게도 건강한 음식이란 사실이다. 얘네들 덕분에 나도 좀 건강해져야겠다.

서대문 박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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