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ㄱ씨는 5년간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항공 제공
5년. 대한항공 직원으로 일하며 직장 내 성폭력 피해를 입은 ㄱ씨가 지금껏 회사와 싸워온 시간이다. ㄱ씨는 대한항공이 성범죄 방지와 가해자 징계 등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고, 그 결과 절반의 승리를 거뒀다. 법원은 지난 7월21일 1심에서 대한항공이 가해자 징계를 하지 않고 사직 처리한 부분에 대한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항공은 이마저 받아들이지 않고 지난달 8일 항소했다. 이 소식을 듣고 ㄱ씨는 “그래도 견뎌보려고요.”라고 했다. 이유는 하나다. “피해자는 계속 생기고, 기업은 가해자를 자르는 것으로 끝내고, 피해자는 따돌림당하다 퇴사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하니까요.”
① “성폭력 실태조사면 되는데…대한항공은 법원 조정도 거부했다”
② ‘마음’ 2280개가 도착했다, 내가 대한항공과 싸워야 하는 이유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걸까’하는 기대가 들었어요. 우리 회사의 직원으로, ○○이 엄마로….”
대한항공 성폭력 피해자 ㄱ씨는 오랫동안 비어있던 메신저 프로필 사진란에 고르고 고른 사진을 올렸다. 그날을 하루 앞둔 지난 7월20일의 일이다.
2020년 7월2일 시작된 재판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올해 7월21일 ㄱ씨는 대한항공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했다. ㄱ씨는 2017년 7월 직장 상사 ㄴ씨로부터 직장 내 성폭력을 당했다. 그는 2019년 12월 회사에 성폭력과 2차 피해 등을 조사해 달라고 요구했다. 대한항공은 ㄴ를 조사하거나
징계하지 않고 사직 처리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ㄱ씨는 그렇게 끝낼 수 없었다. 그는 △대한항공이 성범죄 방지에 필요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고 △ㄴ씨를 징계하지 않고 사직서를 받는 방법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등 사용자로서의 관리 및 감독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지난 7월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2단독 유영일 부장판사는 성범죄 방지에 대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대한항공에 “ㄱ씨에게 1500만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와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이 2020년 11월30일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한진칼 앞에서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에게 사내 성폭력 사건의 직접 해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판사가 주문을 또박또박 읽는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눈물이 났어요.”
기쁨과 아쉬움 그리고 걱정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지난달 3일 서울 한 카페에서 만난 ㄱ씨는 <한겨레>에 심정을 털어놓았다. 아쉬움은 법원이 ㄴ씨의 사직서를 받고 사건을 종결한 부분에 대한 기업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은 부분에서 비롯했다. 회사가 항소할까 봐 두려움도 밀려왔다. 결국 회사는 지난 8월8일 재판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다. 1심에서 법원이 인정한 손해배상금과 소송비용을 부담할 수 없다는 취지다.
“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상대가 싸우자고 하니 죽기 살기로 싸워야겠죠”라고 말하던 ㄱ씨는 막상 대한항공의 항소 소식을 듣자 아득해졌다. ㄱ씨 변호사는 “ㄱ씨의 안전을 생각해 회사가 항소하지 않으면 항소하지 않겠다”며 ㄱ씨가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회사는 회신조차 하지 않았다.
ㄱ씨가 애초 바란 건 ‘돈’이 아닌 조사와 재발 방지였다. 소송 한 달 뒤 조정 절차에서 ㄱ씨는 대한항공에 이렇게 요구했다. ‘외부 기관이 대한항공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직장 내 성폭력 실태를 전수조사할 것.’ 요구를 받아들이면 손해배상 청구를 포기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법원도 2020년 12월22일 “대한항공이 전 임직원을 상대로 성폭력 사건 실태 전수조사를 하고 조사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라”고 강제조정을 결정했다. 대한항공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ㄱ씨의 바람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ㄱ씨는 “제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 실태조사와 개선을 통해 더 좋은 회사가 되기를 바랐던 거예요. 그런데 이것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걸 보면서 앞이 암담했어요.”
재판의 결과는 절반의 승리였다. 법원은 ‘ㄴ씨를 징계하지 않고 사직 처리한 것’에 대해서는 대한항공의 배상 책임이 없다고 봤다. 판사는 ㄱ씨가 성폭력 사건 처리 과정에서 대한항공에 “빨리 종결시키면 되잖아요”라고 말한 것 등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ㄱ씨는 대한항공에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조사 후 회사의 절차에 따라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지, 무조건적인 사직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ㄱ씨는 “대한항공이 ‘가해자에 대한 조사·징계가 공개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고, 무징계 사직에 응하지 않을 경우 소문 등 불이익이 초래될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고 반박한다.
이번 재판 결과에는 ㄱ씨가 고용노동청에 낸 진정에서 대한항공에 과태료가 부과됐다가 취소된 게 영향을 줬다고 봤다. 이 과정에도 문제가 불거졌다. ㄱ씨는 2020년 8월24일 대한항공을 상대로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에 조처 없이 퇴사처리’했다며 중부지방고용노동청(중부노동청)에 진정을 냈다. 중부노동청은 2021년 5월3일 대한항공에 과태료 부과 처분을 했다. 대한항공은 이 또한 받아들이지 않고 이의제기를 했다. 이에 대해 지난 4월20일 인천지법은 대한항공에 과태료 처분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법원의 결정은 “징계 절차 없이 가해자를 퇴사하도록 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이 역시 직장 내 성폭력 발생 시 필요한 조처에 해당한다”는 취지였다. 담당 검사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이 결정은 확정됐다. 문제는 ㄱ씨가 결정이 있고 난 지난 5월10일 대한항공이 법원에 제출한 준비서면을 통해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ㄱ씨는 해당 과태료 재판의 취소를 다투는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검사, 대한항공)가 아닌 탓에 통보를 받지 못한 것이다. 제도의 사각지대다. ㄱ씨는 “중대한 사정 변경이 발생했는데도 중부노동청은 진정인과 피해자에게 어떠한 통지도 하지 않아 피해자의 권리행사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했다”고 봤다. 그는 지난 6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직장 내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진정을 냈다.
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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