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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마음’ 2280개가 도착했다, 내가 대한항공과 싸워야 하는 이유

등록 2022-09-07 13:56수정 2022-09-07 20:18

[인터뷰] 대한항공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ㄱ씨

재판 중 먹지도 자지도 못한 날들 이어졌지만
딸과 2280명 지지자들의 연대 서명에 용기 내
“다시 당당하게 동료들과 함께 일할 날 꿈 꿔”
대한항공 내 성폭력 피해자인 ㄱ씨는 회사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대한항공 제공
대한항공 내 성폭력 피해자인 ㄱ씨는 회사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대한항공 제공

5년. 대한항공 직원으로 일하며 직장 내 성폭력 피해를 입은 ㄱ씨가 지금껏 회사와 싸워온 시간이다. ㄱ씨는 대한항공이 성범죄 방지와 가해자 징계 등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고, 그 결과 절반의 승리를 거뒀다. 법원은 지난 7월21일 1심에서 대한항공이 가해자 징계를 하지 않고 사직 처리한 부분에 대한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항공은 이마저 받아들이지 않고 지난달 8일 항소했다. 이 소식을 듣고 ㄱ씨는 “그래도 견뎌보려고요.”라고 했다. 이유는 하나다. “피해자는 계속 생기고, 기업은 가해자를 자르는 것으로 끝내고, 피해자는 따돌림당하다 퇴사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하니까요.”

① “성폭력 실태조사면 되는데…대한항공은 법원 조정도 거부했다”
②  ‘마음’ 2280개가 도착했다, 내가 대한항공과 싸워야 하는 이유

지난한 과정이었다. 대한항공이 낸 ‘준비서면’을 확인하는 날이면 ㄱ씨의 머릿속은 그 내용으로 가득 차,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신경안정제와 수면제 없이 생활이 불가능했어요. 재판 과정에서 쏟아지는 비난들에 다량의 수면제를 삼킨 적도 있었어요.” 다른 사람에게서 잊히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다.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도 지웠다.

그러나 기어코 힘을 냈다. 버팀목, 딸과 연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딸이 말했어요. ‘다른 엄마들은 딸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해놓는데 왜 엄마는 안 해놓는 거야?’” 딸은 애초 기숙사형 고등학교를 준비했었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딸은 “기숙사에 살아야 해서 매일 엄마를 볼 수 없어 불안하다”며 진학을 포기했다. 외교관이 되겠다던 딸은 ㄱ씨의 재판 사건을 지켜보며 법조인으로 꿈을 바꿨다. 지난 6월 일주일간 이뤄진 ‘대한항공 성폭력 피해자 지원 연대 서명’에서 2280여 명이 ㄱ씨에게 지지 메시지를 보냈다. 쌓이는 응원에 용기를 냈다.

“성폭행을 묵인하고 가해자를 퇴사시키는 대한항공의 행동이 괘씸합니다. 법원이 이를 용인한다면 다른 기업들 또한 성범죄를 방조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고 돕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항공은 관리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멈춰야 합니다. 국적항공사라는 이름에 맞는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대한항공 내 성폭력 피해자 ㄱ씨는 딸과 연대자들의 응원이 있어 용기를 냈다고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대한항공 내 성폭력 피해자 ㄱ씨는 딸과 연대자들의 응원이 있어 용기를 냈다고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재판이 시작된 이후 휴직 중이던 ㄱ씨는 8월1일부터 다시 출근했다. 청심환을 먹고 갔지만 자신과 말을 섞지 않으려는 동료들의 태도에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흘렀다. 예상한 일이지만 덤덤하기가 어려웠다.

2차 피해의 고통이 컸지만 ㄱ씨는 포기하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할 날을 그린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동료들과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날을 꿈꿔봅니다.” ㄱ씨가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의 한 문장이다. 대한항공이 항소를 포기하지 않는 한 ㄱ씨는 다시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강철 멘탈’이 아니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예요. 그래도 견뎌보려고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는 계속 생기고, 기업은 가해자를 자르는 것으로 끝내고, 피해자는 따돌림으로 버티다 못해 퇴사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하니까요.”

“기업, 성범죄 가해자는 징계 뒤 떠나도록 해야”

ㄱ씨 외에도 직장 내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를 단순 사직 처리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해 고통받는 피해자들이 있다. 여성 노동 상담을 받는 서울여성노동자회 평등의전화·고용평등상담실 ‘오늘’(활동명) 상담실장은 “올해 상반기에도 상담실에서 이런 사례들이 접수됐다”고 말했다. 한 상담자는 “회사에 직장 내 성희롱 신고 직후 가해자가 퇴사한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회사에서 신고 후 절차에 따라 조사를 진행했는지 알 수 없다. 징계 차원의 퇴사인지, 행위자 개인 사유로 사직하는지도 알 수 없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또 다른 상담자는 “성폭력 신고를 했더니 가해자가 사직서를 제출했다. 회사에서는 내 신고 탓에 가해자가 퇴사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신상아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장은 “성폭력 가해자가 퇴직이든 사직이든 회사만 나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업주들이 있다. 단순한 사직과, 잘못으로 인한 징계로 인한 퇴사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천지 차이다. 범죄를 저질렀으면 대가를 치르고 그만둬야 가해자가 실질적으로 행위를 했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피해자는 ‘너 때문에 가해자가 퇴사했다’는 말을 들으며 억울함을 풀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신 회장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당장 고통스러우니 빠르게 처리해달라고 할 수 있지만, 회사는 잘못한 사람에 대해 징계 없이 그만두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반드시 세워야 한다. 만약 징계 없는 퇴사를 한다면 피해자와 충분히 고지·협의가 되고 피해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 과정도 기록으로 모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공무원법 제78조의4에서는 퇴직을 희망하는 공무원이 파면, 해임, 강등 또는 정직에 해당하는 징계사유가 있거나 △비위와 관련해 형사사건으로 기소된 때 △징계위원회에 파면·해임·강등 또는 정직에 해당하는 징계의결이 요구 중인 때 △조사 및 수사기관에서 비위와 관련하여 조사 또는 수사 중인 때 등에는 소속 장관 등이 징계의결 등을 요구하여야 하고, 퇴직을 허용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오늘 상담실장은 “회사에서도 횡령이나 배임 등 중대한 문제라고 판단하는 경우 노동자가 사직서를 제출하더라도 쉽게 수리하지 않을 것”이라며 성폭력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는 조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 상담실장은 “성폭력 징계가 적절하지 못한 경우, 피해 노동자는 위축되고 이러한 상황을 목도한 조직원들은 피해가 발생하여도 회사에는 신고해도 피해가 중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였기에 퇴사하거나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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