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지 좀 마”라는 ‘사이다’ 발언을 한다. 하지만 과연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마녀의 법정> 갈무리
직장 동료와 상사로부터 연쇄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한 ‘한샘’ 사건의 후폭풍이 거셉니다. ‘현대카드’에서도 비슷한 폭로가 나와 회사가 입장을 발표하는 등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기업만 문제일까요?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가 쏟아지자 “그나마 이름있는 큰 기업이니까 문제도 삼고 기사도 나는 것”, “규모가 작은 기업들은 훨씬 더한데 징계는커녕 뭘 잘못했는지조차 인식을 못 한다”, “지역에선 꽤 큰 기업인데도 사장이 여직원 손을 잡는 게 기본”이라는 의견이 이어집니다.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직장 내 성범죄’는 왜 이렇게 만연한 걸까요. 애초에 막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더(the) 친절한 기자들’은 ‘직장’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직장 내 성범죄’를 둘러싼 다섯 가지, 우리가 꼭 물어야 할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총정리해봤습니다.
■ 질문 1: 직장 내 성범죄, ‘불기소 처분’만 받으면 끝일까요?
이번 한샘 사건에서 피해자를 두 차례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받은 교육 담당자는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고 해서 교육 담당자의 행동 자체가 사라지는 걸까요? ‘잘못된 일’이 아니게 되는 걸까요? 불기소 처분이니까 폭로한 피해자가 ‘꽃뱀’이 돼야 하는 걸까요?
성범죄는 그 특성상 가해자와 피해자 둘만 있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무법인 태율의 김상균 변호사는 “성범죄는 현실적으로 정황증거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범죄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죠. 더구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직장 내 성범죄’의 경우 “문제를 제기했다가 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발 자체가 어렵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진 변호사는 “성폭행은 둘만 있는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증거가 부족하기 마련인데, 일상적인 관계를 이어간 정황이 나오면 피해자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며 “직장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견딘 시간들이 오히려 피해자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고 꼬집습니다. (
▶관련 기사 : 한샘, 현대카드…‘직장 내 성폭행’ 한참 뒤 폭로되는 이유는?)
법률사무소 나란의 오지원 변호사 역시 “단순히 부당한 지시에도 항의하기 힘든 우리나라의 조직문화를 감안했을 때, 피해자 개인이 문제 제기를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변호사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직장 내 성범죄를 고발하는 것은 ‘무고’일 가능성이 높다기 보단 되레 피해자가 참다 참다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폭발한 경우라고 보는 것이 이성적일 겁니다.
“특히 조직 내에서는 ‘너 하나 때문에 조직이 망신을 당해야겠냐’, ‘너 하나 때문에 임원들이 징계위원회를 열고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낭비해야겠냐’라는 비난을 넘어서기 힘듭니다. 피해자들은 나름 가해자들이 직장 내 동료·상사인 점을 고려해 형사처벌이 아닌 직장 내 징계절차로 최소한의 제재를 가하길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본인도 보호를 받기 원하고요. 그런데 징계위원회는 보통 내부 임원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고, 그 임원은 주로 남성들이며, 조직의 입장과 가해자의 논리를 피해자에게 부지불식간에 강요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피해자가 뒤늦게 검찰 고소를 해도 이미 선행자료(증거)가 오염된 상태이기 때문에 무혐의가 나올 수 있죠. 이후 무고나 명예훼손의 문제가 발생해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가 돼 버립니다.”
-오지원 변호사
물론 가해자가 법적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는데, 직장에서 무조건 이 가해자를 처벌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직장에서 해야 할 일이 끝난 건 아닙니다.
성폭력이나 성희롱이 발생할 수 있는 직장 내 구조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 피해자를 두고 ‘꽃뱀’이라고 손가락질하기보다, 직장 내 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고민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KBS 드라마 <마녀의 법정> 주인공 마이듬 검사(정려원 분)는 상사의 성추행을 지적하며 “야 오수철
■ 질문 2: ‘직장 내 성범죄’를 예방하거나 징계할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하나요?
그렇다면 직장 내 성범죄를 예방하거나 징계할 수 있는 제도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먼저 직장 내에는
‘취업규칙’, 즉
‘사규’가 있습니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통상적으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징계위원회를 열고 징계 수위를 결정합니다. 소셜커머스 업체인
‘위메프’의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위메프’는 감사팀 제보창구를 운영하고 사규에 구체적인 징계 기준을 마련해뒀다고 합니다. 이밖에 ‘건전한 회식문화 만들기’ 사내 캠페인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래 ‘위메프’ 사규를 보면, 회식 자리에서 술 시중을 권유하거나 강요하는 경우, 성관계를 대가로 보상을 요구하거나 약속하는 경우 등 구체적인 사례별로 자세하게 징계 기준을 마련해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메프’의 성범죄 관련 징계 기준. 위메프 제공
위메프 인사팀 관계자는 “(성범죄) 행위자에 대해선 ‘정직 이상’으로 처벌 수위가 높은 편”이라며 “신규 입사자에게 성희롱 예방과 관련한 교육을 추가할 예정이다. 한샘 사건이 발생한 뒤 별도로 직원들에게 당부 메시지를 발송하기도 했다”고도 밝혔습니다.
법으로 규정한 제도도 있습니다. 먼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하고, 행위자를 징계할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매년 1회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하고, 직장 내 성희롱 피해 노동자에 대한 상담·조언 등을 위한
‘명예고용평등감독관’제도도 시행 중입니다.
<남녀고용평등법>
제12조 사업주, 상급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내 성희롱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14조 ①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 발생이 확인된 경우 지체 없이 행위자에 대하여 징계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조치를 하여야 한다.
②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24조 ② 명예감독관은 다음 각 호의 업무를 수행한다.
1. 해당 사업장의 차별 및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시 피해 근로자에 대한 상담·조언 (후략)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근로감독관’이나 ‘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근로자참여법)에 명시된
‘고충처리위원회’ 제도도 있습니다. 고용평등 실현·여성근로자 근로조건 보호 등은 근로감독관의 업무 중 하나죠. 또 근로자참여법은 “상시 30명 이상의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는 근로자의 고충을 청취하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 고충처리위원을 두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고충처리위원은 사내에서 발생한 고충사항을 청취한 뒤 신고, 처리하도록 돼 있습니다.
‘위메프’가 실시하는 ‘건전 회식문화 만들기’ 캠페인. 위메프 제공
■ 질문 3: 성범죄 예방·신고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직장에서 이 같은 제도가 잘 운영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아무개씨는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회식을 할 때
상무가 여직원 옆에 앉아 허벅지 안쪽을 만진다거거나 어깨에 손을 올려 속옷 끈을 돌리는 장면을 빈번하게 봤어요. 그런데 차·부장급 여성은 당해도 ‘으레 그러려니’하고 넘깁니다. ‘대기업에선 그 정도를 견뎌야 여성으로서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조직 문화가 이렇다 보니 그 밑의 대리·사원급 여성 직원들은 성추행을 당해도 말할 엄두도 못냅니다. (가해자가) 직접적인 인사권자인데다 조직의 위계질서가 워낙 심하니까요. 사실
사내 여자화장실에서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사건도 발생했는데 쉬쉬하고 넘어갔습니다. ‘몰카’를 설치한 사람이 징계를 어떻게 받았는지, 다음에 이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처리하겠다든지 하는 사내 공지도 없었습니다.”
물론 반대의 사례도 있습니다. 다른 대기업에 근무하는 고아무개씨는 “사내 방송으로 성희롱, 성추행 등은 징계를 한다고 홍보하고, 신고하라고 장려하는 분위기다. 목격을 한 제3자가 신고를 해도 된다”며 “실제로 징계 결과를 사내 공지사항으로 알려준다”고 밝혔습니다. 또 다른 기업에 근무하는 조아무개씨 역시 “사내에서 실제로 정직을 당한 사례가 있다. 징계를 엄격히 실시하다 보니 10년 전에 견줘 확실히 ‘서로 조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는 편”이라면서도 “지역에 있는 지사는 서울 본사만큼의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똑같은 제도가 마련돼 있다고 해도 기업문화에 따라 운영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 중견기업에서 10여년 간 인사 업무를 담당한 박아무개씨는 “요즘엔 어느 회사나 대체적으로 제도는 잘 마련돼 있다”며 “결국 그 조직이 어떤 문화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박씨는 “회사 대표를 포함, 임원진들이 성평등 문화를 조성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며 “결국 대표의 의지가 임원급, 부서장급, 사원급 등으로 퍼져 조직 문화가 발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외부 감시가 가능한
‘근로감독관’ 제도나
‘명예고용평등감독관’ 제도의 경우 한계점이 뚜렷합니다. 박씨는 “근로감독관은 직장 내 성범죄 뿐만 아니라 임금체불, 비정규직 차별해소, 산재예방 등 담당업무가 많고 1명이 수백개의 회사를 맡아야 한다.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며 “법적인 제도와 조직 문화가 함께 바뀌어야 개선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명예고용평등감독관’ 제도 역시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정미 의원실(정의당)은 지난해 “직장 내 성차별과 성희롱 등을 감시하는 명예고용평등감독관의 75.1%가 남성”이라며 “여성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
▶관련 기사 : 성차별·성희롱 감시하는 ‘명예고용평등감독관’ 75.1%가 남성) 이정미 의원실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올해부터 고용부가 예산을 편성해 명예고용평등감독관들에게 교육을 실시하지만 여전히 보고 의무가 없어 실질적으로 업무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며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밝혔습니다.
외국 기업은 ‘성차별 발언’에도 민감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사진 한겨레DB
■ 질문 4: 외국 기업은 ‘직장 내 성범죄’에 어떻게 대응하나요?
그렇다면 외국 기업은 어떤 제도를 두고 있을까요? 구글 본사에 근무하는 C씨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보통 미국에선 회사 인사부서 내에 ‘조사’(investigations)팀이 따로 있어요. 그래서 고발할 일이 발생하면 자세하게 경위 등을 조사합니다. 이후 문제의 심각성에 따라 형사고발할 가능성을 검토하죠. 형사고발이 아니라면 회사 내부방침(policy)에 따라 격리 조처부터 심한 경우 해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제도 자체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죠? 그런데 실제 사례는 사뭇 다릅니다. 영국 런던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데이터 과학자로 근무하고 있는 주한나씨는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팀에서 게임 개발자 콘퍼런스(GDC)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 누군가 야한 옷을 입은 여성들을 초대해 춤을 추게 했다는 이유로 게임계에서 난리가 났고, 회사 차원에서 바로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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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 Read the email the whole Xbox team at Microsoft just received about sexism)
주씨는 또 “구글의 주주회의에서 한 주주가 여성 CFO(최고재무책임자)에게 ‘레이디(Lady) CFO’라고 부른 적이 있다. 한국식으로 ‘미쓰리’도 아니고 ‘사모님’ 정도의 어감일텐데, 그 자리에서 곧바로 한 사람이 항의했다. 이어 구글 내 여직원들이 항의하는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직함을 ‘레이디 엔지니어’(Lady Engineer)로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며 “이후 성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사내에서 ‘레이디 데이’(Lady Day)를 선포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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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 How the Women of Google Are Clapping Back at Sexism)
이밖에 최근 “테크(tech) 산업에 여성이 적은 이유는 타고난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고 남녀간 임금 차이가 성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한 구글의 남성 엔지니어 역시 “성 고정관념을 전파했기 때문”이란 이유로 해고됐습니다. (
▶관련 기사 : 성차별 메모 쓴 구글 남성 엔지니어가 결국 해고됐다)
주씨는 “(성차별 논란이 여러번 불거졌던) ‘우버’는 높은 직급으로 스카우트 해왔던 전직 구글러가 구글 재직 중 성희롱 문제가 있었던 점이 드러나자,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잘랐다”며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성희롱·성추행을 하면 ‘한 방’에 가는게 상식”이라고 전했습니다.
■질문 5: 우리가 던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다시 ‘한샘’ 사건으로 돌아와보겠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위에 첨부된 그림은 네이버 ‘금융’ 내 한샘 게시판에서 갈무리한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사건이 폭로된 직후 한샘의 주가는 폭락했습니다. 그러자 이 게시판에는 “계집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냐”, “이제 대기업들 여자는 절대 안 뽑겠네”라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죠. 일부 커뮤니티에선 ‘한샘녀’라며 피해자를 대상화하고 ‘한샘 여직원 사진’ 등을 수배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우리의 ‘상식’은 어느 지점에 있을까요. ‘한샘’ 사건과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여자가 웃으며 대화를 나눈다면, 나에게 호감이 있어 보이면, 강간을 해도 되는 건가요? 부하 직원이면, 상사가 만져도 되는 건가요?”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