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60살 영감님을 나는 생각한다. “종로 거리 축음기 상회에서 흘러나오는 ‘익살맞은 대머리’ 타령에 흥이 겨워 어떤 60가량 된 노인이 발을 멈추고 따라 웃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같이 듣고 박장대소한 사건이 있었다.” ‘매일신보’ 1935년 기사다.
‘익살맞은 대머리’는 1930년대를 주름잡던 만담가 신불출의 대표작이다. 내용은 썩 맵다. “해수욕을 가면 어부들이 (내 대머리를) 문어로 잘못 알고, 하하, 모자를 벗고 운동장에 가면 축구공으로 잘못 알고, 하하, 또 어린애 옆에서 자다가 애가 깨 요강인 줄 알면, 하하!” 대머리 영감님의 자기 비하 유머라는 형식이지만, ‘웃음의 공격성’이 잘 드러난다.
엉뚱한 질문 하나. 종로 거리에서 웃음을 터뜨린 영감님은 머리숱이 많았을까? 이분 또한 대머리 아니었을까 나는 상상한다. “요놈, 신불출이, 요 괘씸한 놈”을 내뱉으며 웃었을 것 같다. 모여든 군중이 그 광경을 보며 박장대소하지 않았을까?
근거 없는 상상은 아니다. 소설가 홍명희도 민머리였다. 신불출의 ‘익살맞은 대머리’가 인기를 얻을 무렵 홍명희는 ‘왜 대머리를 비하하느냐’고 항의하는 대신,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조무래기 산적 이름을 신불출로 지었다. “신불출이를 왜 등장시켰느냐로 따지러 가면 (홍명희가) ‘대머리 타령’은 왜 했느냐 역습할까 봐 못 따져.” 1938년에 신불출은 이렇게 말했다. 유머 고수들의 일합을 보는 것 같다.
만담은 “불 같고 칼 같은 말의 예술”이라고 1935년에 신불출은 썼다. 웃음의 공격성을 잘 알았다. 권력의 탄압이 거센 시절, 힘 있는 높은 사람을 웃음으로 공격했다. 일본의 도조 히데키와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망둥이 세마리’라고 비꼬아 만담을 했다.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자기 이름을 ‘에하라 노하라’라고 지어 당국을 빈정댔다. 종로 거리에서 크게 웃을 농담은 아니다. 대머리 영감님은 골목에서 숨죽여 웃었을 거다. 두 웃음이 어떻게 다를까 생각해본다.
해방 후 신불출은 민감한 정치 현안을 건드렸다. 1946년 6월에 “태극기의 네 괘는 미·소·중·일이고 빨간색은 북쪽 공산당, 파란색은 남쪽”이라는 만담을 했다. “국기 모독이다!” 무대에 뛰어 올라온 우익 청년들에게 두드려 맞고 중상을 입었다. 청년들은 “극장 책임자를 끌어내 사죄시키고 태극기를 걸고 청중을 일으켜 경례와 애국가와 묵념을 시켰다.” 정치가 과잉이면 웃음이 사라진다. 70대가 된 영감님은 신불출의 만담에 웃을까 말까 망설인다. 신불출은 이듬해 월북한다. 처음에 잠시 환영받지만, 북한 사회를 풍자해 잡혀갔다 풀려나기를 거듭하던 끝에 1960년대에 숙청됐다는 증언이 있다.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