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말수가 적었다. 내가 어릴 때 둘만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물색없는 농담을 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예수가 골프를 치고 베드로가 캐디를 봤어요. 예수가 ‘아놀드 파머라면 아이언으로 쳤을 거야’라며 아이언을 고집했다가 골프공이 호수로 들어갔어요. 예수는 공을 집으러 물 위로 걸어갔고요. ‘저 사람은 자기가 예수인 줄 아나 봐’라고 사정 모르는 골프선수가 말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대요. ‘아니요. 저분은 자기가 아놀드 파머인 줄 압니다.’”
할아버지는 어려서 신학교를 다닌 독실한 분이었고, 농담은 솔직히 지금 봐도 재미가 없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아무튼 할아버지 생전에 둘만의 대화를 나눌 기회는 더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께 가족은 어떤 의미예요?” 같은 멀쩡한 질문을, 왜 나는 하지 않았을까. 그때 나는 심각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 마지막 장에 장례식 장면이 나온다. 바람이 불어, 조문 온 친구 아버지의 모자를 날려버린다. 추도사를 방해하지 않으며 아버지가 조심조심 모자에 다가갔을 때 한 번 더 바람이 불어 모자는 구덩이 속 관뚜껑으로 떨어졌다. 가족도 조문객도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는다. 아니, 쿤데라가 잘못 썼다. 웃음이 터질 뻔한 까닭은 모자 탓이 아닐 것이다. 웃으면 안 된다는 상황 자체가 우리를 웃게 만들었을 터다.
웃으면 안 될 자리에서 웃고 싶다는 충동은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 같다. 마크 트웨인은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 첫머리에 가려움 이야기를 썼다. 허클베리는 어둠에 숨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다. 그때 발목이, 귀가, 어깨 사이 등이, 심지어 뱃속 내장이 가렵기 시작한다. 허클베리는 “지체 높은 분과 함께 있달지, 장례식에 참석한달지, 몸을 긁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기만 하면 온몸이 가렵다”고 했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 사람 셋이 있다. 어린아이, 술 취한 사람, 미친 사람.”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 에라스뮈스가 소개한 문장이다. 여기에 “웃는 사람”을 나는 덧붙이고 싶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앞장서서 웃음을 터뜨린 것은 웃음을 참지 못하던 어린아이였다. 웃음은 근엄함을 부수고 위선을 걷어낸다. 웃음은 파괴하는 힘이 있다.
그렇다고 그 파괴가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일은 인간적이지만, 웃음을 참는 일 또한 인간의 도리겠다. 장례식에서 웃음을 참고, 해서는 안 될 농담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만 할 수 있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소수민족을 우스개로 만드는 농담을 하지 말아야 한다. 웃음을 다룰 때는 종종 폭발물을 다루듯 조심할 일이다.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