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황학동 중앙시장 내 와인바 술술317. 사진 신소윤 기자
와인 마시러 시장에 갔다. 지난 19일 저녁, 서울 중구 황학동 중앙시장 한복판에 있는 ‘술술 317’. 시장 안 상점에 하나둘 불이 꺼지고, 선술집과 식당 등 몇몇 가게만 불을 밝힌 시간, 짙은 핑크색 바탕에 흰 글씨로 써넣은 ‘난 절대 안주하지 않아’라는 간판 문구가 더욱 도드라진다. 글자 그대로 이 가게에는 안주란 없다. 자리에 앉으면 길거리 음식으로 많이 파는 고구마스틱 한 접시와 물, 메뉴판이 나온다. 메뉴판엔 온통 술이다. 그럼 안주는? 시장에서 조달해오면 된다.
술술317 최다빈(28) 대표는 “시장에 워낙 좋은 안주들이 많아 시도해봤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시장은 신선한 과일부터 해산물과 육류까지 웬만한 안주를 공수할 수 있는 곳 아닌가. 술술317을 찾는 이들은 주로 레드 와인엔 순대, 육전, 육회를, 화이트 와인에는 회, 생선구이, 쌀국수 등을 함께 한다고 한다.
서울 자양동 와인바의 사과 브리치즈 구이. 고래바 제공
중앙시장 맛집으로 알려진 ‘옥경이네 건생선’에서 갑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왔다. 시장을 돌며 수제 어묵과 과일도 샀다. 취재에 동행한 이들이 연신 “여행 온 것처럼 재밌다. 동남아에서 길거리 음식 사다가 와인 마시는 기분”이라며 흥겨워했다.
최 대표가 골라온 안주를 보더니 소비뇽 블랑과 샤르도네가 섞인 칠레산 와인 ‘비냐 마이포’를 추천했다. 마이포 밸리는 칠레에서 좋은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기로 유명한 와이너리다. 술술317에서 판매되는 와인들은 내추럴 와인을 제외하고 2만9천~3만9천원으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가격대다. 최 대표는 “시장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 와인을 최대한 가성비 좋은 것들로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시장통 한가운데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와인을 따르고 시장에서 사 온 안주들을 펼쳤다. 와인의 적당한 산미와 향긋한 복숭아향이 갑오징어와 어묵으로 묵직해진 입안을 개운하게 했다. 눈 앞에 펼쳐진 미용실, 순대∙곱창 간판이 만들어내는 낯선 풍경에 어쩐지 마음이 들떠 술이 술술 들어갔다.
MZ세대가 와인 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르면서, 와인바도 이들 감각으로 재편되고 있다. 무겁고 고루하고 비싸고 진지한 게 아닌 재밌고 편안하고 즐거운 공간들이 늘고 있단 것이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서 인근 와인바들의 시초격으로 불리는 ‘고래바’도 그렇다. 오래된 골목, 레트로한 분위기, 핫한 성수동과 가까운 위치 때문에 최근 힙한 이들의 본거지는 자양동이라는 말도 있다. 고래바는 동네 골목 상가 2층, 카페처럼 캐주얼한 분위기에서 술과 음식을 판다. 비교적 낮은 가격에 와인을 파는 대신 시간제 금액을 받는다. 첫 1시간 이용료는 5500원으로 웰컴 드링크로 와인 한 잔이 제공된다. 이후에는 10분당 1100원의 요금이 과금된다.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웰컴 드링크만 마시고 가고 된다. 외부에서 가져온 와인 콜키지는 1인당 2500원. 메뉴로는 생참치김밥, 양배추와 참깨 소스, 떡볶이 등 기존 와인바에서 보기 어려웠던 음식을 제공한다. 와인 리스트는 250여 종으로 꽤 빽빽하다.
고래바 정보람(39) 대표는 “법칙처럼 뭐에 뭐를 정하고 와인을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는 “지적 허영을 걷어내고 더 편하게 와인에 접근할 수 있으려면, 과도한 소매 가격의 현실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가게 콘셉트를 설명했다.
이 재밌는 가게는 모바일에 익숙한 이들을 위해 인스타그램과 카카오톡도 적극 활용한다. 카카오톡으로 예약 안내와 메뉴판을 제공하고, 인스타그램 고래바 계정(@gorae_point)으로 신메뉴와 새로 입고된 와인 등 소식을 전한다. 별개로 운영하는 고래 포인트 계정(@gorae_point)에서는 매장에서 판매하는 와인 리스트를 전하는데, 계정 맨 앞에 걸어둔 메시지가 즐겁다. “와인은 다 맛있어요. 나와 맞느냐 맞지 않느냐일 뿐. 기대 없이, 열린 마음으로 느껴보세요. 라벨을 마시지 말고 와인을 마셔요, 우리.”
초밥과 와인을 함께 파는 집도 있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있는 ‘밤피장’이다. ‘밤에 피는 장미’의 약자인 가게 이름과 붉은 조명에 오래된 다방 같은 내부 인테리어가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레트로를 좋아하는 요즘 세대의 취향을 저격했다.
지난해 12월 밤피장을 연 김원빈(31) 대표는 와인과 초밥을 둘 다 좋아해서 가게를 차렸다고 한다. 노포나 횟집에 가도 화이트 와인 한 병 들고 가서 맥주잔에 따라 마시는 걸 좋아했다는 그는 “고급 스시 가게에 가면 콜키지를 내고 마실 와인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본격적으로 와인을 취급하는 스시집이 없는 게 아쉬웠고, 기존 와인바는 너무 정적이고 모던한 분위기여서 주로 집에서 와인을 먹었다”고 한다.
밤피장의 대표 메뉴는 우엉과 오이로 식감을 더한 김초밥에 생참치와 연어, 연어알을 수북이 얹어낸 ‘밤피장스시’다. 김 대표는 이 메뉴를 미국 나파밸리 와인인 ‘마릴린 멀롯’과 먹어보길 권한다. “화이트 와인과 해산물을 같이 먹으면 물론 맛있지만, 부드럽고 화사한 메를로 품종과도 의외로 잘 어울린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새로운 조합이 궁금한 마음에 침이 꼴깍 넘어간다.
밤피장의 대표 메뉴, 밤피장스시. 밤피장 제공
이 외에도 참치, 광어, 연어, 새우튀김, 계란말이, 오이, 우엉 등으로 속을 가득 채운 회김밥인 ‘밤피장후토마끼’도 인기가 많다. 초밥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어, 광어, 참치, 단새우 초밥 등도 접시당 3천~8천원에 판다. 1만원 안팎의 ‘미니 사시미’, 숙성 광어회를 식초와 레몬즙에 재워 만든 ‘청양고추세비체’는 스페인식 생선 샐러드를 한국식으로 해석한 메뉴로 인기가 많다. 해산물 메뉴가 주력이지만 의외로 부동의 1위는 ‘트러플 감자튀김’이라고 한다.
이들 안주와 함께 마실 와인은 의외로 단출한 구성이다. 와인을 즐기는 이라면 마트에서 한두 번쯤 사 마셔봤을 법한, “사람들 눈에 익은, 가격도 편안한 와인” 20종 안팎이 준비되어 있다. 주문할 때는 와인 앞에 매겨진 번호를 불러야 한다. “와인을 좋아하는 저도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일이 읽는 게 좀 오글거리고 창피하더라고요.” 허세를 걷어버린 김 대표의 설명이다. 격의 없이 다가온 와인바, 맛의 새로운 장을 탐색하는 와인바들이 젊은 와인족들의 마음을 홀리고 있다.
신소윤 기자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