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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의찬찬히읽기] 이겸로 선생 고서점 영업원칙은 에누리

등록 2006-10-19 21:05

최성일/도서평론가
최성일/도서평론가
최성일의 찬찬히 읽기

<통문관 책방비화> 이겸노 지음. 민학회 펴냄

산기 이겸노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책꽂이에서 <통문관 책방비화>를 꺼내 펼쳐본다. 1909년 평남 용강군 삼화에서 태어난 선생은 1920년대 중반 서점 점원으로 서적계에 몸담아 옛책을 사고파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1934년 문을 연 금항당 서점은 8.15 해방을 맞아 통문관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출판을 겸업하기도 한다.

이 책은 선생이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을 모은 것이다. 1987년 초판이 나왔고 이듬해 재판을 찍었다. 책의 절반 가까이 되는 ‘책방비화’는 선생이 고서점을 경영하는 동안 겪은 선생과 책과 손님 사이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먼저 고서점의 영업 원칙 같은 게 흥미롭다. 매매에는 책값이 싸도 에누리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흥정을 하면서 아무리 싸더라도 달라는 대로 선뜻 다 내주면 상대방이 너무 싸게 파나보다 하는 의심을 갖는 동시에 흥정이 깨지는 수가 있어서다. 또한, “책이나 서화나 골동이나 고급 희귀품일 경우에는 함부로 누구에게나 돌리는 것은 절대로 금물이다. 그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고 또 그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재력이 있을만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

선생은 독서와 서지학에도 일가견이 있다. 독서인 사이에 전래되는 ‘세 바보’ 속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세 바보란 책을 빌려달라는 사람, 빌려주는 사람, 빌려보고 돌려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장서가 많아도 모든 책을 빠짐없이 갖출 순 없는 노릇이므로 꼭 필요한 책이 수중에 없고 쉽사리 구하기 어려울 때는 친구나 동료간에 서로 빌려주고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1960년대 중반 논문을 쓴다며 희귀 잡지 50여 권을 빌려간 사람은 선생에게 책을 돌려줬는지 모르겠다. 이겸노 선생은 우리 옛책에 필사본이 많은 까닭을 독서법에서 찾는다. 책을 읽는 데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소리 내어 읽기, 눈으로 읽기, 마음으로 읽기다. 이 중 마음으로 읽기를 “제일로 손꼽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십독(十讀)이 불여일사(不如一寫)’란 게 있다. 열 번 읽는 것이 한 번 베끼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필사본이 판본 못지않게 수두룩하다.”

최초의 국한문 혼용 서적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아니라는 선생의 주장이 눈길을 끈다. 선생은 문체를 대조하여 <서유견문>은 현토식 한문체에 지나지 않으며, <내각열전>이 국한문을 혼용한 새로운 문체라고 강조한다. 일본 메이지 시대 내각 중신들의 간략한 전기를 번역한 <내각열전>은 간행연도도 <서유견문>보다 9년 앞선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으나 근대화된 인쇄술이 침체한 원인으로는 몇 가지 사회정치적인 불합리를 꼽는다. 우선, 사농공상의 계층 서열이 기술자를 낮춰보고 천대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책의 수요가 적은 수의 학자와 집권층에 국한된 점을 든다. 그리고 “금속과 종이 등 필요한 물자와 기술자 및 인력이 풍부하지 못했던 것도 인쇄기술의 발달을 가져오지 못하게 된 부수적 원인으로 생각된다.”

금항당 서점의 작명 배경을 감안하면, 통문관으로의 개명은 자연스럽다. 선생이 넘겨받은 서점 이름은 금문당이었다. 책방 이름을 뭘로 지을까 망설이던 선생의 눈에 어느 교과서 표지의 금항당서적이 들어왔고, “간판에 돈을 덜 들이기 위해 가운데 ‘문’을 지우고 교과서에서 본 ‘항’자를 써 넣었던 것이다.” 창업자는 세상을 떠났지만 일제강점기의 고서점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통문관의 전통이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최성일/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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