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손님 발길질에 차여도…비굴하게 더 비굴하게

등록 2013-11-27 21:04수정 2013-12-03 16:30

일러스트 유아영
일러스트 유아영
마음을 짓밟는 감정노동
⑤ 비굴 : 최선을 다해 낮아져야 한다

비정규직 등 ‘나쁜 일자리’ 확산
‘층층시하’ 감시받는 노동자들
자존감 낮고 자기비하에 빠져
“매일 옮겨가며 소모품처럼 일해”

전문가 “한국, 감정노동 유독 심각
비민주·반인권적 경영조직체계 탓”

이아무개씨는 의류 매장 판매직원으로 일했던 3년 전의 일을 잊지 못한다. 바지를 입어본 남성 손님에게 다가가 쭈그리고 앉아 길이에 맞게 바짓단을 접어주려는데 그가 “어딜 만지냐”며 이씨를 발로 찼다. 넘어진 이씨는 얼굴이 벌게진 채 주변에 있는 동료들을 바라봤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이씨는 “이상한 손님 만난 셈 치고 넘기려고 했는데 너무나도 무관심한 동료들, 오히려 나를 타박하는 매니저의 모습을 보니 내가 못난 건가 싶어 수치심이 몰려왔다”고 말했다. “내가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다들 나를 더 무시한 건 아닌지….”

그가 일한 곳은 유명 해외 브랜드의 매장이었다. 판매직원들은 본사 소속이 아닌 매장 소속이었지만 서비스와 실적 등은 본사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이씨는 “실적을 맞추기 위해 매출이 덜한 날은 직원들이 자기 신용카드를 긁어 액수를 채우고 매출이 많은 날 현금을 가져가는 행위를 반복할 정도로 본사의 눈치를 봤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네 번 쉬면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120만원을 받았다.

직접 빈곤노동을 체험한 뒤 르포를 쓴 미국 언론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그의 책 <빈곤의 경제>에서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 모욕적인 행위들(약물검사, 끊임없는 감시, 관리자의 엄한 질책)이 저임금을 유지하는 요인”이라며 “만약 자신이 별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하면 자기가 받고 있는 임금이 실제로 자신의 가치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실장은 “판매직 노동자는 직영·임대, 정규·비정규·파견 등 대단히 복잡한 고용관계 속에 여러 주체의 눈치를 보면서 일하게 된다”며 “콜센터의 경우 비정규직·파견 노동자들이 알아서 말도 소곤소곤 하는 등 위축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감정노동’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 어디에든 있다. 그런데도 유독 한국 사회에서 ‘감정노동’ 폐해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의 비정상적인 아웃소싱·비정규직의 확산”이 노동자에게 갈수록 더 강도 높은 ‘비굴’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한다. 비굴을 강요하는 구조에서 많은 노동자들은 자기존중감을 낮추고 자기비하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상당수 포함된 서비스 노동자 83명의 <내마음보고서> 분석 결과를 보면 특히 ‘자기비하’(주의·경고 수준 24.5%) 성향이 두드러졌다.

지난 9월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보면 용역·파견 노동자는 2002년 42만6000명에서 10년 만에 89만6000명으로 갑절 넘게 급증했다. ‘하청업체 정규직’이어서 비정규직으로 구분되지 않는 사내하청 노동자도 2010년 현재 300인 이상 사업장에만 32만6000명이 일한다. 원청과 하청의 ‘갑을관계’ 아래서 고객을 접하는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층층시하’ 감시 속에 더 극심한 감정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지난 15일 서울시 인권위원회가 발족 1주년을 맞아 ‘120 다산콜센터 감정노동 및 고용실태’ 토론회를 열었다. 박원순 시장 취임 후 발족한 인권위원회가 처음으로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감정노동’인 셈이다. 이날 토론장에서는 다산콜센터 사무실에 24시간 켜져 있는 ‘작업량 현황 모니터’가 공개됐다. 화면에는 실시간 상담 콜수, 대기 콜수, 응대율 등의 수치가 빼곡했다. 토론자로 나온 이선희 상담원은 “지난 4년 동안 사무실에 작은 서랍 하나도 갖지 못한 채 매일 자리를 옮겨가며 소모품처럼 일했다”며 울먹였다.

‘서울시 대표번호’로 알려진 ‘120’ 다산콜센터에 전화를 하면 하청업체에 소속된 상담원들이 전화를 받는다. 3개 층에 각각 3개 민간 하청업체에서 파견 나온 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2만8000통의 전화를 나눠 받는다. 365일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며 각 민간업체에서 나온 6~7명의 팀장이 상담원 150~160명을 관리한다. 하청업체들은 2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므로 서울시에 고객이 민원을 하는 일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선희씨는 “하청업체는 상담원들에게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민원인에게도 무조건 친절하라고 강요하고 민원인이 잘못해도 상담원에게 사과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실장은 “현재 다산콜센터 상담원들은 여성노동, 감정노동,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 저임금 노동이라는 4중고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 회사 안에서도 고객 서비스를 전담하는 부서를 하위직으로 간주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국내 한 화장품회사 고객상담실에서 일하는 직원은 마인드프리즘에 이메일을 보내 “정말 웃음을 잃지 않으려면 회사가 상담실을 홀대하는 분위기에 맞서 늘 전투를 해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영국의 언론인 폴리 토인비는 <거세된 희망>에서 “텔레마케터가 전화를 걸었을 때 사람들은 대뜸 엉뚱한 말을 귓속에 퍼붓는 텔레마케터의 행동을 주제넘은 사생활 침해라며 화를 내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청 직원이나 말단 부서가 떠안는다. 한 콜센터 상담원은 “실적을 올려야 다른 부서로 갈 수 있으니까 열심히 영업한다. 동료들은 앞으론 영업을 하지 않기 위해서 팔아서는 안 되는 상품까지 팔며 극심한 감정노동을 감수한다”고 말했다.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은 “감정노동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것은 최소 인원으로 최대의 효율을 얻기 위한 기업의 과도한 업무량 부과와 비민주적, 반인권적 경영조직체계, 생산체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자기비하

사람은 자신이 크든 작든 가치있는 존재라는 확신으로 산다. 그러나 자기 존중감을 지킬 수 없고 비굴한 태도로 살아야 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기비하적 상황이 되면 실패를 견디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단점에만 집중하며 열등감과 우울, 무기력을 떨치기 어렵게 된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꽁트] 마지막 변신 1.

[꽁트] 마지막 변신

일 피아니스트 후지타 마오 “조성진이 롤모델…임윤찬은 놀라운 재능” 2.

일 피아니스트 후지타 마오 “조성진이 롤모델…임윤찬은 놀라운 재능”

파벌화·음모론이 낳은 내전…한국 민주주의 위한 ‘예언서’ [.txt] 3.

파벌화·음모론이 낳은 내전…한국 민주주의 위한 ‘예언서’ [.txt]

‘미학의 마르크스’ 루카치, 소설론 통해 사유의 궤적 좇다 [.txt] 4.

‘미학의 마르크스’ 루카치, 소설론 통해 사유의 궤적 좇다 [.txt]

경복궁 주변 파봤더니 고려시대 유물이 줄줄이? 5.

경복궁 주변 파봤더니 고려시대 유물이 줄줄이?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