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하림은 갑자기 어깨에 큰 통증을 느꼈다. 팔을 올릴 수조차 없었다. 2017년 방송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간 쿠바 아바나에서였다. 낯선 타지에서 병원에 가려니 두려움이 앞섰다. 용기 내어 가니 친절하게 잘 치료해주었다. 치료비도 저렴했다. 급성 염증은 씻은 듯이 나았다.
한국에 돌아와 라파엘클리닉에 전화했다.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다. 역지사지의 경험이 그의 마음을 이끌었다. “제가 뭐 도울 일 없을까요?” “이주노동자를 위해 공연해주세요.” 매달 한번씩 ‘국경 없는 음악회’를 열었다. 하림이 노래하고, 이주노동자들 사연을 듣고, 그들도 노래하는 자리였다. “다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타지에서 일하며 눈물짓는다는 걸 알게 됐죠.” 지난 17일 서울 금천구 작업실에서 만난 하림이 말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됐다. 3년간 해온 ‘국경 없는 음악회’도 멈췄다. 그때 전자우편 한통이 왔다. 미디어·콘텐츠 스타트업 프로젝트퀘스천에서 보낸 것이었다. 2010년 충남 당진에서 용광로에 추락해 숨진 20대 청년의 10주기를 맞아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하림은 그들을 만나 얘기했다. “노래 하나 만든다고 확 바뀌진 않을 겁니다. 중요한 건 모두 함께 부르며 마음을 모으는 거예요. 그러니 노래 챌린지를 하면 어떨까요?” ‘국경 없는 음악회’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노래가 제페토 시인의 시에 하림이 선율을 붙인 ‘그 쇳물 쓰지 마라’다.
하림이 지난 9일 열린 창원노동문화축제에서 노래하고 있다. 창원노동문화축제 제공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를 시작으로 챌린지는 들불처럼 번졌다. 호란, 두번째 달 등 음악가는 물론 중대재해처벌법 입법에 앞장서온 장혜영 정의당 의원 등 정치인도 동참했다. 예상외로 일이 커지자 주변에서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칠 수 있으니 그만하는 게 좋겠다’고 하기에 이렇게 답했어요. ‘두부 사러 나갔다가 3·1운동에 휩쓸린 격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요.”
사각지대 노동자 위한 곡 ‘우사일’
악보와 연주 영상 블로그 4일 공개
“사람들 먼저 불러야 노래 힘 생겨”이주노동자 위한 무료공연 3년 이어
‘그 쇳물 쓰지 마라’ 노래 챌린지도
“노동 행사 나가며 노동문제 눈떠”
김미숙 대표도 만나고 여러 노동 관련 행사에 나가면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필수 노동자니 플랫폼 노동자니 특수고용이니 하는 것들을 공부하면서 느낀 건, 카페에서 일하다 커피머신에 데는 것처럼 일상의 작은 사고와 노동의 힘듦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거예요. 사무직 노동자도 저녁·주말도 없이 일하면서 느끼는 고충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분들은 어디 호소할 곳도 없어요.”
그런 사각지대의 노동자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든 노래가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우사일’)이다. 그는 지난 4일 자신의 블로그에 악보를 올리고, 에스엔에스(SNS)로 알렸다. 자신이 직접 부른 음원이나 영상 대신 악보부터 올린 건, 사람들이 먼저 스스로 불러야 노래의 힘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우사일’) 악보. 하림 제공
다음날인 5일 저녁 그는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서 퇴근길 직장인들을 위한 거리공연 ‘금천라이브’를 펼쳤다. 애초 ‘우사일’을 부를 계획은 없었으나, 행사를 주최한 금천문화재단의 요청으로 앙코르곡으로 불렀다.
“내가 일하다 다치면 엄마 가슴 무너지고요/ 집에 못 돌아가면은 가족은 어떡합니까/…/ 저녁엔 집에서 쉬고 휴일에는 여행도 가는/ 그런 평범한 일들이 왜 나는 어려운가요.” 거리의 관객들 사이에서 “내 얘기 같아서 슬프다”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하림은 지난 9일 창원노동문화축제에서도 이 노래를 불렀다.
아직까진 반응이 미미하다. 그래도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악보를 공개하기 전인 지난달 20일 어느 청년 교사 모임에서 강연하면서 이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이후 교사들 쪽에서 먼저 악보를 요청해서 보내줬다고 한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점차 퍼져가는 것 같아요. 요즘 선생님들 많이 힘들어 하시잖아요. 그래서 더욱 공감하시나 봐요. 김목인, 조준호 등 음악 하는 친구들도 하나둘씩 부르고 있어요. 요즘 같은 분위기에 목소리 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따로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그는 “이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악보에 내 이름을 쓰지도 않았다. 보통의 사람들이 많이 부르고 널리 퍼져나갔으면 하는 바람뿐”이라고 했다. 유튜브에 자신이 노래하는 영상을 올리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대신 누구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악보와 함께 피아노 반주, 멜로디 라인을 넣은 영상을 올렸다. 유튜브에서 ‘우사일’을 검색하면 상단에 뜬다.
“이제 이 노래를 사람들 사이에 놓아 스스로 일하게 하려고 해요. 이번에는 ‘그 쇳물 쓰지 마라’ 때와 달리 노래운동을 주도하는 어떤 조직도 단체도 없어요. 모든 노래가 그렇듯 부르는 사람들 모두가 주인이 되어 깃발이 되면 나부끼게, 눈물이 되면 흐르게 하려고요. 언젠가 노래가 물처럼 흘러 사람들과 함께 낮은 곳에 모이게 되면, 그때는 저도 그 자리에 친구들과 악기를 모아 함께 노래할 겁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