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2월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중대 민생침해 금융범죄 대응방안 및 금융부담완화대책 민당정협의회’에 참석하며 윤희근 경찰청장 뒤를 지나가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편집국에서] 황준범 | 정치부장
정치인이나 정부 고위직이 어떤 일에 잘못이나 책임을 인정할 때 보통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국민의 질타를 겸허히 수용한다는 의미이고, 나아가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까지 내포한 표현들이다.
윤석열 정부 최고 실세로 꼽히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화법이 다르다. 검찰 출신 정순신 변호사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된 지 하루 만에 사퇴했다. 그에 대한 검증을 맡은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이 한 장관 소관이다. 그는 기자들이 부실 검증에 관해 묻자 “결과적으로 그렇지만, 제가 관장하고 있는 기관에서 있었던 것이고 국민께서 우려를 많이 하니 당연히 정무적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정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과 소송전이라는 ‘아빠 찬스’, ‘2차 가해’ 전력을 걸러내지 못한 게 “결과적으로” 자신의 일이고, 그에 따라 “정무적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신속 분명하게 선을 긋고, 오히려 “책임감을 갖고 더 충실하게 일하겠다”고 했다. ‘내 잘못만은 아닌데, 아무튼 미안해하는 게 맞는 거 같다’는 얘기로 들린다. ‘학교폭력 근절’로 초점을 옮기려 하며 인사 실패에는 입 꾹 다물고 있는 대통령실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까.
정순신 사태에는 ‘검찰공화국’ 꼬리표를 단 윤석열 정부의 본질적 특성들이 집약돼 있다. 정부는 ①검경 수사권 조정에 따라 2년 전 탄생한 경찰 국가수사본부장에 검사 출신을 앉혀 경찰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검찰의 수사권 장악’에 열을 올렸고 ②그 과정에서 인사 추천(복두규 대통령실 인사기획관, 이원모 인사비서관), 검증(한동훈 장관, 이시원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 임명(윤 대통령)에 이르는 ‘검찰 끼리끼리’ 인사 시스템의 한계를 노출했다. 검찰 출신이라 느슨한 잣대가 작동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구조다. 더구나 2018년 언론보도로 정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당시, 윤 대통령(지검장)과 한 장관(3차장), 정 변호사(인권감독관)는 서울중앙지검에서 함께 근무했다.
③한 장관 등은 정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 논란을 “몰랐다”고 하지만, 유명 자율형 사립고를 다니다 전학한 정 변호사 아들의 학적 기록을 보고 그때라도 이유를 살폈다면 알았을 일이다. 하지만 학교폭력과 ‘아빠 찬스’의 민감성을 몰랐거나 간과했고, 결과적으로 이 정부의 무딘 공감능력 수준을 보여줬다. ④인사검증을 맡은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은 지난해 6월 ‘시행령 꼼수’ 비판 속에 설치된 조직이다. 대통령실 민정수석실은 없애고 해당 기능을 법무부에 맡겨야겠는데, 여소야대 국회 구조에서 입법은 어려우니 시행령과 규칙을 고쳐서 탄생시킨 조직은 1년도 안 돼 취약점을 드러냈다.
⑤가장 문제는 역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부의 태도다. 이번 일은 경찰청과 법무부, 대통령실 어딘가에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희근 경찰청장은 “추천권자로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로 ‘아무런 실권 없음’을 실토했고, 한동훈 장관은 “정무적 책임감”이라는 말로 실질 책임에서 비켜섰다. 윤석열 대통령은 인사 실패에 대한 최소한의 유감 표명이나 문책 없이 교육부에 “학교폭력 근절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면서, 이번 사태의 중요한 한 측면에는 등을 돌리고 있다.
정순신 사태는 젊은 세대와 부모 세대에게 분노와 허탈감을 주고, 윤 대통령이 내건 ‘공정과 상식’의 허상을 일깨웠다. 국민에게 큰 상처를 줬으면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누군가는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말이나 행동이 있어야 한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 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책임론이 제기되자 윤 대통령은 “책임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라며 이 장관을 감쌌다. 정순신 사태는 이태원 참사에 비하면 책임 소재가 훨씬 단순 명확하지 않은가.
오는 9일로 당선 1년을 맞는 윤 대통령이 지금까지의 구조와 관성에 변화를 줄 걸 기대하긴 어렵다. 제1야당이 리더십 위기로 정부 견제 능력을 잃은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하지만 힘 못 쓰는 야당이 우습다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국민 마음마저 쉽게 봐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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