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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순신 아들 학폭’ 학교의 기숙사 ‘블랙리스트방’은 떳떳한가

등록 2023-03-05 19:03수정 2023-03-06 11:13

민족사관고등학교. 연합뉴스
민족사관고등학교.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박수지 | 이슈팀장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을 다룬 판결문은 지난 일주일 수없이 보도됐다. 그중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얘기하고 싶다.

“피해 학생으로서는 1학년 1학기 때 친했던 친구들과 분리되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소위 ‘H방’으로 배정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1학년 2학기 때 원고(정 변호사 아들)를 포함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원고가 있었던 기숙사 방을 찾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가해 학생의 학교폭력을 판단하며 이 대목을 썼다.

판결문과 <한겨레> 취재 내용을 종합하면, 이들이 다닌 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 기숙사에는 학생들이 ‘블랙방’이라고 부르는 방들이 있다고 한다. 민사고는 전교생이 기숙 생활을 한다. 방마다 3명씩 지낸다. 학생들은 학기를 마칠 때쯤 다음 학기에 ‘방을 같이 쓰고 싶은 친구’(화이트리스트)와 ‘같이 쓰기 싫은 친구’(블랙리스트)를 최대 3명 적어낸단다. 그 결과 블랙방에서 지내는 학생들은 학내에서 ‘공인된’ 선택받지 못한 학생들이 된다.

피해 학생은 1학년 2학기 때 블랙방에 배정됐다. 정 변호사 아들 정씨와 같은 동아리 생활도 했던 피해 학생은 친구들이 있는 방에 종종 놀러 갔다고 한다. 거기서 정씨는 피해 학생에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라며 “꺼져라” “돼지” 등의 말을 했다고 한다. 정씨는 이전에도 피해 학생에게 언어폭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런 폭언으로 정씨는 전학 등 징계 처분을 받았다. 피해 학생은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한 가운데, 가해 학생의 부모는 징계 처분에 불복해 행정심판과 소송 등으로 1년가량 시간을 끌며 ‘2차 가해’를 했다. 여기엔 이견이 없다.

다만 ‘선택받지 못한 학생들’의 방이 나올 수밖에 없게 기숙사 배정 시스템을 설계한 학교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지 묻고 싶다. 이른바 블랙리스트끼리 모인 블랙방이라는 이름에서 엿보이듯, 이 제도 자체가 일부 학생들에 대한 따돌림에 학교가 구조적으로 가담한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기숙사 룸메이트를 임의로 배정하되, 예외적으로 함께 지내기 어려운 친구를 별도 신청받는 정도로 설계했더라면 이토록 공공연한 낙인은 없었을 것이다. 블랙방 학생의 소외감과 좌절을 가늠하기 어렵다. 가해 학생에겐 블랙방의 존재가 ‘다른 친구들도 피해 학생을 싫어한다’는 심리적인 면죄부를 줬을 수도 있다.

블랙방이 없어진다고 학교폭력이 근절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학교가 최소한 가해 학생에게 폭력의 명분을 주거나 행위를 강화하는 원인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법 이전에 상식이다. 지금은 학교가 이런 ‘블랙방들’을 사소하거나 가볍게 보는 게 더 큰 문제로 보인다. 학교는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선도해야 할 ‘사후 책임’만 지니지 않는다. 최선의 대책은 예방이다. 예방 관점에서 개별 학교에 따돌림을 강화하는 제도나 관행이 있는지 일종의 ‘학교폭력 영향평가’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사소해 보이지만 교사가 체육 시간에 일부 학생들에게 팀원 선택권을 넘겨 결과적으로 특정 소수 학생이 매번 배제되지는 않는지도 살펴볼 대상으로 보인다.

예전의 학교폭력 사실이 밝혀지면, 프로 운동선수나 아이돌은 사실상 업계를 떠나야 하는 게 요즘 분위기다. 일반 학생들도 대입에 영향을 받기에 ‘질 수 없는 싸움’을 한다. 이전부터 내려온 학내 제도나 관행이더라도 학교폭력을 둘러싼 달라진 분위기에선 그 구조가 더는 중립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판결문에 첨부된 회의록에서 민사고 교사는 가해 학생을 두고 “본인보다 급이 높다고 판단하면 굉장히 잘해주고, 급이 낮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모멸감을 주는 식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이로 인한 폭력이 있었다면 학교가 가해 학생에게 적절한 징계를 내리고 선도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블랙방이 이 ‘급’을 나누는 ‘공인인증서’가 되지는 않았을까.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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