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노들장애인야학 김명학·천성호 교장
“유감스럽게도 없어요. 나를 교장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너무 쑥스러워 명학이 형이나 학생이라고 부르라고 해요.”
2021년 3월 천성호 활동가와 함께 노들장애인야학(노들) 4대 공동 교장으로 선출된 김명학씨에게 지난 2년 교장으로 일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뭐냐고 하자 나온 답이다. 노들의 최장기 재학생이기도 한 그는 나지막하지만 또박또박하게 말을 이었다. “학생·상근자들과 함께 집회에 나가 우리 목소리를 직접 사회나 정부에 대고 외칠 때 가장 좋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 말에 천성호 교장은 “명학이 형은 1년에 적어도 100번 이상은 집회에 나갑니다”라고 거들었다. 김 교장은 집회나 인터뷰 등 장애인 권익옹호 활동에 주로 힘을 쏟고 천 교장은 학교 재정이나 관리를 맡는단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검정고시로 뒤늦게 들어간 대학 시절부터 야학 교사로 살아온 천 교장은 ‘노들의 비티에스(BTS)’로 불린다. 김 교장이 그 이유를 들려줬다. “다정하게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고 챙겨주니까요.”
지난 19일 서울 혜화역 근처 노들 사무실에서 두 공동 교장을 만났다. 오는 8월8일은 노들장애인야학이 서울 광진구 정립회관에서 첫발을 뗀 지 꼭 30년이다.
김명학
30년간 휴학 안한 최장기 재학생
“내 주체관 변한 게 가장 큰 배움”
연간 100번 이상 집회 참가하며
장애인 권익옹호 활동에 힘 쏟아
“장애인 정책은 예산·의지의 문제” 어릴 때부터 뇌병변 장애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온 김 교장은 30대 중반에 노들에서 처음 공부를 시작했다. 노들이 문을 열고 3개월쯤 지나 수업을 듣기 시작한 그는 10여년 전 초·중·고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했다. 지난 30년 단 한 차례도 휴학하지 않았단다. “한 번 쉬면 습관이 될 것 같았어요. 노들은 나에게 장애인으로 어떻게 사는 게 우리 권리를 갖는 것인지 생각하게 해주었어요. 장애는 가족이 아니라 국가의 문제라는 것도 알려주었어요.” 노들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게 뭐냐는 질문에는 “내 주체관이 변한 것”이라고 김 교장은 답했다. “그 전에는 우물 안 개구리였어요. 지금도 답답한 감은 있지만요. (노들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요구하고 싸우면 사회가 조금씩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사회는 변하지 않아요. 우리 사회는 비장애인 위주입니다. 저 같은 중증장애인이 살아가려면 사회가 변해야 합니다. 사회 환경이 바뀌어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함께 살 수 있어요.” 그의 전임자인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대표는 무려 24년 동안 노들의 교장이었다. 김 대표는 취임식 때 봉투에 24만원을 담아 ‘박경석 동생’에게 ‘용돈’을 줬다. 노들을 만나기 전 ‘재가장애인’이었던 자신에게 ‘주체관의 변화’라는 큰 선물을 안긴 ‘동생’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노들은 한국 장애운동의 받침돌로 불린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 일어난 휠체어 장애인의 리프트 추락사가 기폭제였다. 그 뒤로 박경석 교장과 이 학교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이동권 등 장애인 권리 확보를 위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사회는 더디지만 조금씩 변했다. “저상버스와 장애인 콜택시, 활동지원사, 장애인 권리 확보 중심의 공공일자리 등이 노들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싸운 결과이죠.”(천 교장) 천 교장은 노들 재학생 80여명 중 많을 때는 30여명이 장애인 권리 옹호 활동에 참석한다고 했다. “전장연 집회에 노들 학생과 교사가 많이 참여해요. 장애인 단체 중 가장 열심이죠.” 그는 노들 재학생은 뇌병변 장애인이 약 30명, 발달 장애인이 약 35명이며 기타 장애 유형이 10여명이라고 했다.
천성호
늦깎이 대학생 때부터 야학 활동
박경석 전 교장 권유로 노들 합류
다정한 관심에 ‘노들 BTS’로 불려
장애인야학 90년대 2곳서 50곳↑
“소외 있는 한, 야학 역할은 계속”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천 교장은 만 24살에 사회학 전공 대학생이 됐다. 대학 입학 전에 봉제나 기계 제작 공장에서 3~4년 일한 그는 대학 때부터 야학 활동에 나섰다. “제가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는 서울 구로섬돌야학과 난곡 남부야학에서 약 10년 가르쳤고 서울지역야학협의회와 전국야학협의회 활동도 했다. 2009년에는 <한국야학운동사-자유를 향한 여정 110년>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노들 교장 선거 때 ‘배움과 투쟁, 노동’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왜 배움에 투쟁이 필요할까’ 묻자 그는 야학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처음 야학에서 가르친 학생들이 구로공단 봉제공장 노동자였는데요. 야학 공부 뒤에도 이분들의 삶에 변화가 거의 없더군요. 대학 진학자도 거의 없었고, 잘 가도 방송대 정도였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학생도 없었죠. ‘왜 그럴까’ 답을 찾다 불평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가 박경석 전 교장 권유로 2010년 노들과 교사로 인연을 맺고 8년 뒤에는 상근활동가가 된 것도 이런 생각이 영향을 미쳤다. “다른 야학도 중요하지만 장애인 야학에 더 시급하고 위급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죠. 권리가 배제되고 무너진 삶들이 보였거든요. 장애인 야학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봤죠.” 교장이 된 뒤에도 발달장애 학생들에게 ‘자기 권리 표현’을 주제로 수업을 해왔고 이번 학기에는 영어 수업을 맡은 천 교장은 “노들에서 오히려 많은 힘을 얻는다”고 했다. “제가 보기에 노들 학생들은 건강하고 예쁘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꾸미는 분들입니다. 여기 와서 뭐라도 배우려고 노력하고 투쟁도 열심히 하면서 자기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가는 분들이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힘을 많이 얻어요.” 천 교장에게 요즘 노들의 미래를 위해 가장 고심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장애인들이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데 노들의 역할이 뭔지 많이 생각해요. 노들은 장애인 문제와 별개가 아니거든요. 30년 가까이 장애해방운동을 가장 열심히 해온 곳이죠. 이런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게 노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죠. 그리고 30년 행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도요.” 같은 질문에 김 교장은 “예산”이라고 답한 뒤 덧붙였다. “(노들 학생 중) 휠체어 장애인들이 많아 몇 명만 와도 공간이 차요. 더 넓은 데로 옮기면 좋겠는데…” 천 교장은 현재 노들 공간 임대료의 20%인 연 5천만원 이상을 노들이 자부담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들 후원자는 약 1천명입니다. 상근 활동가 15명에 수업만 하는 교사가 20명 더 있죠.” 김 교장은 30년 가까이 노들 동지와 투쟁하면서 장애인 정책은 “예산과 의지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단다. “(정책 당국이) 돈과 의지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어요. 우리가 서울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했을 때 서울시는 건물 구조상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는데 결국 2015년에 설치했어요. 우리가 싸워 얻은 이 엘리베이터를 지금은 비장애인들이 잘 이용하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야학 활동가이자 야학 연구자이기도 한 천 교장에게 ‘한국 사회와 야학’에 대해 물었다. “90년대 야학할 때는 2천년대가 되면 야학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천년대에는 문해 교육 야학이 생기더군요. 그 뒤에는 이주여성 문해 교육이 나왔고 그다음 들어온 게 장애교육이죠. 90년대에 장애인 야학이 두세 군데였는데 지금은 50개가 새로 만들어졌어요. 비장애인 야학은 100군데에서 50군데로 줄었죠. 한국에서 야학은 소외되고 변방으로 밀린 사람들이 배움을 통해 삶을 만들고 자신들의 권리도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역할은 계속될 겁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김명학(오른쪽) 천성호(왼쪽) 노들장애인야학 4대 공동교장이 ‘투쟁’을 외치며 인터뷰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30년간 휴학 안한 최장기 재학생
“내 주체관 변한 게 가장 큰 배움”
연간 100번 이상 집회 참가하며
장애인 권익옹호 활동에 힘 쏟아
“장애인 정책은 예산·의지의 문제” 어릴 때부터 뇌병변 장애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온 김 교장은 30대 중반에 노들에서 처음 공부를 시작했다. 노들이 문을 열고 3개월쯤 지나 수업을 듣기 시작한 그는 10여년 전 초·중·고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했다. 지난 30년 단 한 차례도 휴학하지 않았단다. “한 번 쉬면 습관이 될 것 같았어요. 노들은 나에게 장애인으로 어떻게 사는 게 우리 권리를 갖는 것인지 생각하게 해주었어요. 장애는 가족이 아니라 국가의 문제라는 것도 알려주었어요.” 노들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게 뭐냐는 질문에는 “내 주체관이 변한 것”이라고 김 교장은 답했다. “그 전에는 우물 안 개구리였어요. 지금도 답답한 감은 있지만요. (노들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요구하고 싸우면 사회가 조금씩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사회는 변하지 않아요. 우리 사회는 비장애인 위주입니다. 저 같은 중증장애인이 살아가려면 사회가 변해야 합니다. 사회 환경이 바뀌어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함께 살 수 있어요.” 그의 전임자인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대표는 무려 24년 동안 노들의 교장이었다. 김 대표는 취임식 때 봉투에 24만원을 담아 ‘박경석 동생’에게 ‘용돈’을 줬다. 노들을 만나기 전 ‘재가장애인’이었던 자신에게 ‘주체관의 변화’라는 큰 선물을 안긴 ‘동생’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노들은 한국 장애운동의 받침돌로 불린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 일어난 휠체어 장애인의 리프트 추락사가 기폭제였다. 그 뒤로 박경석 교장과 이 학교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이동권 등 장애인 권리 확보를 위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사회는 더디지만 조금씩 변했다. “저상버스와 장애인 콜택시, 활동지원사, 장애인 권리 확보 중심의 공공일자리 등이 노들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싸운 결과이죠.”(천 교장) 천 교장은 노들 재학생 80여명 중 많을 때는 30여명이 장애인 권리 옹호 활동에 참석한다고 했다. “전장연 집회에 노들 학생과 교사가 많이 참여해요. 장애인 단체 중 가장 열심이죠.” 그는 노들 재학생은 뇌병변 장애인이 약 30명, 발달 장애인이 약 35명이며 기타 장애 유형이 10여명이라고 했다.
늦깎이 대학생 때부터 야학 활동
박경석 전 교장 권유로 노들 합류
다정한 관심에 ‘노들 BTS’로 불려
장애인야학 90년대 2곳서 50곳↑
“소외 있는 한, 야학 역할은 계속”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천 교장은 만 24살에 사회학 전공 대학생이 됐다. 대학 입학 전에 봉제나 기계 제작 공장에서 3~4년 일한 그는 대학 때부터 야학 활동에 나섰다. “제가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는 서울 구로섬돌야학과 난곡 남부야학에서 약 10년 가르쳤고 서울지역야학협의회와 전국야학협의회 활동도 했다. 2009년에는 <한국야학운동사-자유를 향한 여정 110년>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노들 교장 선거 때 ‘배움과 투쟁, 노동’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왜 배움에 투쟁이 필요할까’ 묻자 그는 야학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처음 야학에서 가르친 학생들이 구로공단 봉제공장 노동자였는데요. 야학 공부 뒤에도 이분들의 삶에 변화가 거의 없더군요. 대학 진학자도 거의 없었고, 잘 가도 방송대 정도였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학생도 없었죠. ‘왜 그럴까’ 답을 찾다 불평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가 박경석 전 교장 권유로 2010년 노들과 교사로 인연을 맺고 8년 뒤에는 상근활동가가 된 것도 이런 생각이 영향을 미쳤다. “다른 야학도 중요하지만 장애인 야학에 더 시급하고 위급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죠. 권리가 배제되고 무너진 삶들이 보였거든요. 장애인 야학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봤죠.” 교장이 된 뒤에도 발달장애 학생들에게 ‘자기 권리 표현’을 주제로 수업을 해왔고 이번 학기에는 영어 수업을 맡은 천 교장은 “노들에서 오히려 많은 힘을 얻는다”고 했다. “제가 보기에 노들 학생들은 건강하고 예쁘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꾸미는 분들입니다. 여기 와서 뭐라도 배우려고 노력하고 투쟁도 열심히 하면서 자기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가는 분들이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힘을 많이 얻어요.” 천 교장에게 요즘 노들의 미래를 위해 가장 고심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장애인들이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데 노들의 역할이 뭔지 많이 생각해요. 노들은 장애인 문제와 별개가 아니거든요. 30년 가까이 장애해방운동을 가장 열심히 해온 곳이죠. 이런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게 노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죠. 그리고 30년 행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도요.” 같은 질문에 김 교장은 “예산”이라고 답한 뒤 덧붙였다. “(노들 학생 중) 휠체어 장애인들이 많아 몇 명만 와도 공간이 차요. 더 넓은 데로 옮기면 좋겠는데…” 천 교장은 현재 노들 공간 임대료의 20%인 연 5천만원 이상을 노들이 자부담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들 후원자는 약 1천명입니다. 상근 활동가 15명에 수업만 하는 교사가 20명 더 있죠.” 김 교장은 30년 가까이 노들 동지와 투쟁하면서 장애인 정책은 “예산과 의지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단다. “(정책 당국이) 돈과 의지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어요. 우리가 서울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했을 때 서울시는 건물 구조상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는데 결국 2015년에 설치했어요. 우리가 싸워 얻은 이 엘리베이터를 지금은 비장애인들이 잘 이용하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야학 활동가이자 야학 연구자이기도 한 천 교장에게 ‘한국 사회와 야학’에 대해 물었다. “90년대 야학할 때는 2천년대가 되면 야학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천년대에는 문해 교육 야학이 생기더군요. 그 뒤에는 이주여성 문해 교육이 나왔고 그다음 들어온 게 장애교육이죠. 90년대에 장애인 야학이 두세 군데였는데 지금은 50개가 새로 만들어졌어요. 비장애인 야학은 100군데에서 50군데로 줄었죠. 한국에서 야학은 소외되고 변방으로 밀린 사람들이 배움을 통해 삶을 만들고 자신들의 권리도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역할은 계속될 겁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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