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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이웃 집처럼…7평짜리 연립에 남긴 ‘이일훈의 생각’

등록 2022-06-29 09:00수정 2022-06-29 11:43

‘불편하게 지어 살자’ 건축가 이일훈 1주기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탄생할 ‘지벽간’. 이일훈1주기추모모임 제공
리모델링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탄생할 ‘지벽간’. 이일훈1주기추모모임 제공

천주교 수도원과 성당 건축으로 대부분의 건축 인생을 보냈던 이일훈(1954~2021) 건축가의 선종 1주기를 맞아 가톨릭 신부와 수도자를 비롯한 지인들과 후배 건축가들이 기념 공간을 꾸민다.

기념 공간 ‘지벽간’은 서울시 양천구 신월동의 낡은 연립주택의 23㎡(7평)짜리 방 4칸을 리모델링해 꾸려진다. 이 연립은 이일훈의 부모가 지은 집으로 자신들은 3층에 머물며 1·2층은 세를 주던 것을 고인에게 물려주어 고인이 40년간 살던 공간이다. 이일훈은 자신이 설계하지 않았지만, 이 집에 마련한 자신의 작업 공간을 ‘종이로 만든 벽으로 된 곳’이란 의미의 지벽간(紙壁間)이라고 불렀다. 지벽간은 리모델링 후 8월 중순 개방되어 이일훈의 건축 철학 ‘채나눔’과 관련한 건축의 전시와 후배 건축학도들의 연구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일훈은 1998년 인천 동구 만석동 달동네에 저예산으로 만든 지상 3층, 연면적 148㎡(45평)의 ‘기찻길 옆 공부방’을 건축한 것을 비롯해 공동체 공동주택인 서울 마포 성미산 ‘소행주’, 충남 홍성군 홍동면 ‘밝맑도서관’, 경기도 가평의 ‘우리 안의 미래 연수원’, 출판사 청년사의 사옥 등을 설계했다.

그가 건축가로서 대부분의 삶을 보낸 곳은 종교 건축물이었다. 그는 경기도 안성 도피안사 향적당을 설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생애를 천주교 수도원과 성당을 설계·건축하며 보냈다. 그는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에 위치한 ‘자비의 침묵 수도원’을 비롯해 제주도 서귀포의 ‘면형의 집’과 강정마을의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 서울 성북동에 있는 한국순교복자수도회 본원, 옛 본원 리모델링, 경기도 이천의 성안드레아병원, 인천교구의 노동자인성센터, 청주교구의 생극성당, 인천 미추홀구의 숭의동성당 등을 설계했다.

생전에 출연한 방송에서 건축 철학을 얘기하고 있는 이일훈. 이일훈1주기추모모임 제공
생전에 출연한 방송에서 건축 철학을 얘기하고 있는 이일훈. 이일훈1주기추모모임 제공

그는 성당과 수도원을 지으면서도 채나눔을 실천했다. 채나눔은 안채와 바깥채, 사랑채를 각각 떨어뜨려 지었던 전통적인 건축 기법에 따라 ‘건축물을 작게, 떨어뜨리고, 불편하게 지어살자’는 철학을 담고 있다. 그는 수도원을 지을 때도 기도 공간인 경당을 숙소와 멀리 떨어뜨리곤 했는데, ‘왜 경당에 갈 때마다 바깥 날씨에 따라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게 지었느냐’는 수도자들의 하소연에 ‘반성하고 기도하러 가는 길인데 옷을 갈아입고 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답하곤 했다. 이에 따라 그의 건축은 수도자들의 수도 정신을 되살린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일반인들에게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어떻게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즉 집의 규모나 모양보다 사는 방식과 목적을 먼저 고민해서 집 구상을 하도록 했다.

이일훈 1주기 추모모임을 준비 중인 한국순교복자수도회 ‘면형의 집’ 원장 양운기 수사는 “‘교우들이 내는 돈을 관리비로 써버리거나 집 관리에만 신경을 쓰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추구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자기 과시나 위세를 내보여 위화감을 주지 말고 이웃의 보통 주택들과 어울리도록 작게 짓자’는 게 이일훈의 생각이었다”면서 “‘면형의 집’도 ‘토지 경계선까지 건물이 차지하게 하지 말고 이웃과 행인을 위해 배려하자’는 그의 제안으로 담을 토지 경계선 안으로 들이고 경계에 벤치를 놓았다”고 회고했다.

이일훈1주기추모모임이 이일훈 선생의 얼굴과 행사 내용을 합성해 만든 포스터. 이일훈1주기추모모임 제공
이일훈1주기추모모임이 이일훈 선생의 얼굴과 행사 내용을 합성해 만든 포스터. 이일훈1주기추모모임 제공

지난해 폐암이 발병한 지 2개월 만인 7월에 세상을 떠난 그가 마지막 3년간 심혈을 기울여 지은 집도 인천의 숭의성당이었다. 이 성당은 그가 떠난 뒤 인천시건축상을 수상했다. 숭의성당 김영욱 신부는 “성당을 짓고 나서 스테인드글라스가 정말 예뻐서 사진을 찍어 병원에 입원한 그에게 보내줬을 때 그가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내줬다”고 회고했다.

“사람들은 저보고 성당 하나 지었다고 하지만, 이 성당에 세상을 다 담았습니다. 신부님, 입에 담기는 가벼우나 ‘신앙의 신비’, ‘빛의 신비’를 세속 공간에서 구현시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 일단을 보는 것이 황홀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언제일지, 정신 잃고 엉엉 울거나, 제대 뒷벽의 빛과 그림자를 보고 깊은 묵상과 심연의 반성으로 가는 길목의 순간이 되기를 기대하고 구상했습니다. 아, 숭의동에는 유월의 화단이 성당 안에 피었군요.”

이일훈 1주기 추모모임은 지벽간 조성에 들어갈 6000여만원을 십시일반으로 모으고 있다.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전소장은 “코로나19로 이일훈의 선종 소식조차 듣지 못한 지인들이 너도나도 도와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일훈 1주기 추모미사와 추모제는 오는 7월2일 오전 10시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광릉추모공원에서 열린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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