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일/출판칼럼리스트
최성일의 찬찬히 읽기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뜨인돌 펴냄
사물의 이치를 대강 파악하기 시작할 무렵 헤르만 헤세가 20세기 작가라는 사실에 당황한 기억이 있다. 그때까진 적어도 그가 카프카보다 한 세대 앞서는 니체와 동년배쯤으로 여겼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감명 깊게 읽을 즈음 그가 남긴 책과 독서에 관한 경구들이 신선하게 다가왔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의 본격 독서론을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다.
이 책은 책·독서·문학에 관한 헤세의 글을 모았다. 거듭 읽기를 강조한 것을 빼고는 헤세의 독서관이 내 평소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반가웠다. 이마저 내가 같은 책을 두세 번 읽는 경우가 드물다는 독서습관을 가졌을 뿐이지 나도 거듭 읽기의 중요성은 인정한다. 헤세는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읽는 문학의 범위와 소장도서 중에서 특정 문학이나 사조 혹은 작가들을 골라내는 데는 기본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면서 권장도서나 최우수도서 100선 같은 건 없다고 되뇐다. 각자가 끌리고 수긍하고 아끼고 좋아하여 특별히 선택하는 책들이 있을 뿐이라는 거다. 따라서 누구든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 길은 수백 수천 가지나 된다.
“교과서나 동화책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셰익스피어나 괴테 혹은 단테로 끝낼 수도 있다. 정해진 길은 없으니 각자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을 읽도록 한다. 끌리지 않고 저항감이 일어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작품이라면 억지로 인내하며 애써 읽으려고 하지 말고 도로 내려놓는 편이 낫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특정도서를 읽어라 강권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헤세가 마구잡이식 책읽기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그의 독서체험에 바탕을 둔 세계문학 도서목록은 동서양 고전을 망라한다. 첫 단추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 가장 오래 간다’는 정신사의 원칙에 따라 성서, 우파니샤드를 간추린 <베단타>, 불경, <길가메시> 서사시, <논어>, <도덕경> 등에다 장자의 우화 같은 ‘인류가 보유한 문헌의 기본화음’들이 꿴다. 헤세는 목록작성에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을 슬금슬금 끼워 넣는 일은 삼간다. 또한 ‘세계문고’의 목록구성이 얼추 마무리되자 바로 검증과정을 거친다.
이때까지 안타깝게도 내 책상 앞 책꽂이에 꽂혀 있는 <뷔히너 문학전집>의 주인공은 헤세의 호명을 받지 못했다. 목록 감수 막판 드디어 그의 이름이 불린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를 깜빡했다. <보이체크>, <당통의 죽음>, <레온체와 레나>의 작가를 말이다! 그를 빼놓을 수야 없는 일이다!)” 헤세는 진지한 책읽기를 주문한다. “독서로 정신을 ‘풀어놓기’보다는 오히려 집중해야 하며, 허탄한 삶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거짓 위로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독서는 우리 삶에 더 높고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일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는 책의 가치를 따질 때, 그 책의 유명세나 인기도에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수준 높은 ‘독서훈련’은 오직 양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울러 넓고 얕게 읽기보다는 좁고 깊게 읽기를 바란다. 이 책이 독서의 기술적 요소를 다루긴 하나 그런 측면을 앞세우는 건 이 책의 본질을 잠시 잊은 실수다. 원제목을 그대로 풀어 ‘책(독서)의 세계’라고 하는 게 옳다. 최성일/출판칼럼니스트
이때까지 안타깝게도 내 책상 앞 책꽂이에 꽂혀 있는 <뷔히너 문학전집>의 주인공은 헤세의 호명을 받지 못했다. 목록 감수 막판 드디어 그의 이름이 불린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를 깜빡했다. <보이체크>, <당통의 죽음>, <레온체와 레나>의 작가를 말이다! 그를 빼놓을 수야 없는 일이다!)” 헤세는 진지한 책읽기를 주문한다. “독서로 정신을 ‘풀어놓기’보다는 오히려 집중해야 하며, 허탄한 삶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거짓 위로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독서는 우리 삶에 더 높고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일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는 책의 가치를 따질 때, 그 책의 유명세나 인기도에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수준 높은 ‘독서훈련’은 오직 양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울러 넓고 얕게 읽기보다는 좁고 깊게 읽기를 바란다. 이 책이 독서의 기술적 요소를 다루긴 하나 그런 측면을 앞세우는 건 이 책의 본질을 잠시 잊은 실수다. 원제목을 그대로 풀어 ‘책(독서)의 세계’라고 하는 게 옳다. 최성일/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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