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현지시각)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군인들이 쿠데타 저항 시위를 해산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양곤/AP 연합뉴스
전 세계적으로 군부가 퇴조한 가운데, 미얀마 군부는 어떻게 60년 이상 정권을 유지했을까?
미얀마는 지난 2월1일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으로 돌아갔다. 시민들은 연일 쿠데타에 저항하는 거리 시위를 벌이고, 군부는 발포도 마다하지 않는 강경 진압에 나서는 대치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사태를 이해하려면, 크게 세 가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160여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고 영국 식민지를 거친 미얀마의 특수한 역사, 그 속에서 군부의 역할과 위상, 여기에 더한 국제사회의 지정학적 변화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축을 바탕으로, 미얀마 군부 쿠데타의 향방을 문답 형식으로 전망해본다.
-미얀마에서 군부가 장기 집권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이 나라 현대사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 때문이다. 작금의 쿠데타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미얀마에서 군부는 건국과 독립은 물론 이후 국정을 주도한 정치 세력으로 그 만큼의 지분을 행사해왔다. 소련과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집권한 뒤 당 중심으로 권력을 운용했다. 미얀마에서는 독립과 건국 주도 세력이 군부로 남아, 권력을 승계해왔다. 군부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을 뿐이다.
미얀마의 원형은 서기 11세기부터 국토의 중심인 이라와디강 유역에 자리잡은 버마족 왕국이다. 몇차례 왕조가 교체되다가 19세기말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인도를 거쳐 침공한 영국은 당시 버마와 세차례나 전쟁을 벌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국의 식민통치에 본격적으로 저항해 독립과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현재 군부의 기원인 버마독립군이다.
-버마독립군 세력이 어떻게 건국 중심 세력이 됐는가?
=버마독립군은 현재 군부에 의해 구금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이 일본에서 결성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아시아에서 영국 세력을 축출하자, 아웅산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버마 독립을 추구했다. 아웅산의 버마독립군이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편에 선 것이 현재 미얀마 비극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일본군이 영국 식민지인 버마를 침공할 때, 아웅산의 버마독립군이 동참하기도 했다. 반면, 미얀마의 소수민족들은 영국 등 연합군 쪽에 섰다. 다수민족인 버마족 중심의 미얀마가 줄곧 서방 세계와 불화한 배경이다.
버마족 지도자인 아웅산은 1947년 미얀마 소수민족과의 협상을 통해 연방국가를 건설하는 ‘팡롱협정’을 맺었다. 아웅산은 임시정부인 미얀마행정위원회 부의장으로 취임해, 건국 작업을 하다가, 같은 해 정적에 의해 암살됐다. 그가 암살된 뒤 건국된 버마연방에서 초대 총리 우누 등 친서방 세력이 집권했다. 우 누는 아웅산과 달리 무장 독립투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건국 주도 세력인 네윈 등 버마독립군은 군부로 남았다.
-건국 초기 군부가 국정을 장악하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군정이 성립된 것인가?
=독립 이후 지속된 소수민족과의 분쟁이 가장 큰 배경이다. 이에 더해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부군이 북부 국경지대를 점령한 것도 한 원인이다. 소수민족의 무장투쟁과 국부군에 대처하면서, 군부에게 권력이 집중됐다.
미얀마는 총 160여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 이중 정부가 인정하는 소수민족만 135개다. 언어도 100여개가 넘는다. 건국의 바탕인 팡롱협정도 소수민족들과 연방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건국 이후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버마족 위주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이뤄지면서 소수민족들이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는 무장투쟁이 분출했다. 북서부 변경주인 샨주의 샨족, 북부의 카친족, 남부의 카렌족 등은 독립 이후 지금까지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미얀마는 독립 이후 지금까지도 기술적으로는 내전 상태다.
국부군 패잔부대가 북부 접경 지대를 점령한 것은 더 심각한 위기였다. 미얀마는 중국과 갈등의 역사가 있는 데다, 국부군 패잔부대들이 주변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에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내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네윈이 이끄는 군부의 권력이 커졌고, 허약한 우 누 정부는 1958년 네윈에게 임시총리를 맡아줄 것을 요구하며 권력을 넘겼다. 네윈은 선거로 다시 구성된 정부에 권력을 넘겼다가, 1962년에 쿠데타로 집권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군정의 길을 열었다.
-소수민족 문제는 언제부터 비롯된 것인가?
=소수민족 문제는 군정뿐 아니라 미얀마라는 나라의 최대 모순이다. 미얀마의 현재 영역은 영국 식민통치 때 성립됐다. 이라와디강 유역의 다수민족인 버마족이 주변 지역에 영향력을 갖기는 했으나, 과거에는 이런 영역이 성립된 적은 없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때 영국과 프랑스가 남아시아에서 세력분할을 하면서 타이 서쪽이 영국 세력권으로 획정됐고, 영국은 현재의 영국령 버마를 만들었다. 영국도 처음에는 남부 버마, 북부 버마, 변경지역 3개의 별개 지역으로 통치했다.
버마족은 팡롱협정에 의해 건국된 미얀마를 자신들의 중앙집권적 국가로 여겼다. 반면 나머지 소수민족들은 과거보다 자치나 독립의 공간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군부가 ‘버마족의 국가’ 미얀마를 지키는 보루로서 기능한 것이 군정 지속의 배경이다. 이 때문에 영국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는 미얀마를 “지도 제작자들의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 정치지도 위에 표시된 버마는 자연스런 지리적 혹은 역사적 실체가 아니다”라며 “19세기말 영국 제국주의 무력 외교와 행정 편의의 창조물”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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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군부독재는 냉전과 분단을 배경으로 한다. 미얀마에서는 군정이 제도화된 셈인데, 국제적 배경이 있지 않나?
=미얀마 역시 냉전 전후의 지정학적 정세가 결정적이었다. 미얀마 군부는 반서방 버마민족주의에다가 사회주의 성향이었다. 군부는 미국과 영국이 미얀마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만들려고 소수민족 분리독립을 부추긴다고 봤다. 군부가 건국 초기 국부군 패잔부대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협력하며, 중국과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1960년대 이후 베트남전 등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은 군부정권의 반서방 노선을 더욱 강화했다.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 군사정권은 이때부터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독자 노선을 취했다. 1970년대 중반 인도차이나 전쟁 종결도 미얀마의 반서방 고립폐쇄 노선을 결정화하는 계기가 되는 역설을 낳았다. 미-중이 화해하면서 베트남전 종전이 가능했고, 종전 뒤 미국은 아시아에서 대중국 봉쇄망을 풀었다. 이는 중국 세력권의 인정을 의미했다. 미국 등 서방은 중국과 긴밀한 관계였던 미얀마를 중국 세력권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개입을 중단했다.
네윈 정권은 베트남전이 끝난 1974년에 버마연방사회주의공화국 헌법을 제정했고, 형식적으로 군정을 종식했다. 전역한 군인들이 주도하는 버마사회주의프로그램당의 일당 체제로 전환했다. 미얀마는 이때부터 완전히 서방 등 국제사회와 절연되는 고립·폐쇄 노선으로 접어들었다. 1970년 중반까지 한국 축구의 아시아 경쟁자였던 버마와의 경기를 볼 수 없게 된 배경이다.
-미얀마가 다시 국제사회의 ‘문제’로 등장한 1988년 민주항쟁의 배경은 무엇인가?
=군부정권의 고립·폐쇄 노선으로 미얀마는 아시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군부정권의 사회주의 프로그램은 군인들의 이권 축적의 도구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전 종전 이후 동남아에 경제개발 붐이 일고, 한국과 필리핀에서는 군부독재가 종식되는 물결이 일었다.
민생고에 시달린 미얀마 시민들은 1988년 ‘8888 항쟁’으로 불리는 광범위한 반독재 시위 운동을 벌였다. 군부는 3천여명을 사망자를 낼 정도로 무차별 진압을 했다. 동시에 군부는 통치력을 상실한 네윈 정권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군정 형태로 복귀했다. 당시 영국에 살던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치가 어머니의 간병으로 귀국했다가, 버마 민주항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군부는 민주화 압력 앞에서 1990년 5월 다당제 선거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군부는 이 선거에서 아웅산 수치를 내세운 야권 세력인 민족민주동맹(NLD)이 의석의 80%를 차지하는 압승을 하자, 선거 결과를 취소하고는 군정을 이어갔다.
-2015년 결국 아웅산 수치의 민족민주동맹으로 권력이 이양되지 않았는가?
=국내외적인 요인이 상호 작용을 했다. 첫째, 미얀마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이다. 1988년 항쟁 이후 미얀마에서는 시민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2007년 8월에는 88년 항쟁에 버금가는 샤프론 혁명이라는 민주화 투쟁이 벌어졌다.
둘째, 국제정세의 변화다. 샤프론 혁명이 일어난 2007년 이후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는 ‘아시아태평양으로의 귀환’ 전략을 발표했다. 대중국 봉쇄망을 다시 구축하려는 미국이나, 이 봉쇄망을 뚫고 인도양으로 나가려는 중국 모두에게 미얀마는 중요 고리가 됐다. 미국은 미얀마를 더이상 중국의 세력권으로 인정하지 않고, 적극적인 개입에 나서기 시작했다. 제재 강화라는 채찍과 경제지원이라는 당근을 동시에 제시하는 개입 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서 미얀마 군부는 대외적으로는 개방, 국내적으로 타협이라는 이중 트랙을 통해 권력을 공유하는 연착륙 전략을 택했다. 군정은 이미 1997년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에 가입하며, 외교적 고립에 탈피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고립과 국제적 제재 앞에서 유일한 대외창구였던 중국의 영향력이 커진 것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다. 시민들의 반중국 정서가 큰 데다, 군부 역시 커지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자신들의 권력과 경제 이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샤프론 혁명 뒤인 2008년 5월 군부는 신헌법 국민투표를 통해 민주화 일정을 내놓았다. 헌법은 다당제 투표를 통한 민간정부 수립을 명시했으나, 군부가 의회 의석의 25%를 지명하는 한편 국방·내무·국경수비 부처 장관을 독점하도록 했다. 군부와 민간정부의 권력공유 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신헌법에 따라 2010년 치러진 총선은 수치의 민족민주동맹 참가가 불허되고 사실상 군부의 연합연대개발당(USDP) 일당 선거였다. 이 선거에 따라 2011년 3월30일 군 총사령관에서 전역한 테인 세인을 대통령으로 하는 형식상의 민정이 성립됐다.
테인 세인 정부 출범 이후 국내적으로는 수치의 가택연금 해제와 민족민주동맹의 선거참여 허용이 이뤄졌다. 대외적으로는 2011년 12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방문을 시작으로 서방과의 관계정상화에 들어갔다. 미얀마는 2012년 1월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발표해, 국제사회 복귀를 일단락했다. 특히, 미얀마는 2013년 테인 세인의 백악관 방문을 계기로 본격적인 미-중 등거리 외교로 전환해, 일방적인 친중 노선에서 탈피했다.
2015년 11월 치러진 총선에 민족민주동맹이 참가해, 투표로 결정되는 의석의 80%를 얻는 압승으로 집권했다. 외국 국적의 배우자를 가진 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헌법에 따라 수치는 국가고문 직책으로 실질적인 국가 지도자가 됐다. 하지만, 군부는 헌법 개정 비토권 및 국가안보와 치안 권력도 유지했다. 이는 군부, 수치의 민족민주동맹, 미국이 권력공유와 국제사회 복귀를 타협한 결과다.
-왜 군부가 권력공유 타협을 깨고 다시 쿠데타에 의한 군정 복귀를 택했나?
=이 역시 국내외적인 요인이 결합됐다. 첫째, 소수민족 문제가 군부와 수치 사이의 권력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군부는 2017년 서부 연안 라카인주 무슬림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여, 70만명의 로힝야족 난민위기를 조성했다. 군부가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로힝야족 소탕작전을 벌인 것은 자신들의 역할을 제고하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수치의 입지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수치는 로힝야족에 대한 혐오가 큰 다수 버마족의 정서를 의식해, 이 작전을 옹호했다. 수치의 노벨평화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이 일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치러진 총선에서 수치의 민족민주동맹은 의석을 늘렸고, 군부의 연합연대개발당은 오히려 의석이 줄었다. 군부를 반대하는 시민들로서는 수치 외에는 대안이 없기도 했거니와, 수치가 소수민족 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다수 버마족의 지지가 증폭됐다.
둘째, 로힝야 사태 이후 미얀마를 사이에 둔 미-중의 각축이 다시 격화됐다. 수치는 집권 직후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주석과 회담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 확대를 추구했다. 로힝야 사태로 서방의 비난을 받은 수치는 한층 중국 쪽으로 밀착했다. 중국 역시 수치 정부에 대한 정책적 개입을 확대했다. 군부와 중국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냉랭해졌다.
군부로서는 ‘3중 포위’의 위기를 느꼈을 수 있다. 지난해 총선 결과가 예상보다 저조한 데다,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로힝야 사태로 다시 미국 등 서방의 제재 대상이 됐다. 군부는 수치 정부에게 총선의 불공정성 등을 문제삼아 조사를 요구하다가, 결국 지난 2월1일 쿠데타를 감행했다.
-쿠데타 이후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과 군부의 강경진압이 정면 충돌하고 있다. 사태가 바뀔 전기는 없는 것인가?
=현재로서는 군부가 물러서거나, 권력의 균열이 보일 조짐은 없다. 하지만, 1988년 직후와는 달라진 국내외 상황이 변수다. 당시 3천명을 희생시키는 전면적인 탄압에도 미얀마의 군부독재가 건재했던 것은 애초부터 고립·폐쇄 노선이었던 데다, 중국이라는 마지막 보루가 버텨줬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개입도 미약했고, 그 실효성도 없었다.
하지만 현재 미얀마는 상당한 수준의 개방이 이뤄진 데다, 군부를 받쳐줄 중국의 버팀목 비중은 낮아졌다. 중국 역시 미얀마 군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줄었다. 군부가 1988년 때와 같은 전면적인 싹쓸이 탄압을 감행하면, 중국도 반군부로 돌아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이 미얀마 사태의 관건이란 말인가?
=중요 변수라 할 수 있다. 쿠데타 직전인 지난 1월 군부와 수치 정부 사이에서는 타협이 모색됐고, 중국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수치 정부의 거부로 타협은 무산됐고, 군부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쿠데타 이후 군부의 대중국 입장은 더욱 미묘해지고 있다. 군부는 미얀마가 중국의 영향권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군부에 고용된 아리 벤메나세라는 유명한 이스라엘인 무기거래 로비스트는 워싱턴의 로비업계 매체인 <포린 로비> 및 <로이터> 통신과의 회견에서 “아웅산 수치가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에 알려진 것보다 큰 역할을 했고, 미얀마를 중국의 영향권으로 흘러가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벤메나세는 자신이 지난주 군부에 의해 고용돼 “미얀마의 진짜 상황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며 미국 등으로부터 오해받는 미얀마의 장군들을 돕겠다고 밝혔다. 그는 <로이터>와 회견에서 “(수치가) 중국에 더 접근하려는 데 반대해, 서방 및 미국 쪽으로 움직이려는 (군부의) 진정한 추동이 있다”며 “그들은 중국의 괴뢰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군부가 반중친미 노선을 취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는 또 “국가 지도자로서 로힝야족을 탄압한 이들 중 한 명이 아웅산 수치이며, 군부가 한 것이 아니다”라고도 항변했다. 그는 “군부는 정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한다”며 “하지만, 그것은 과정”이라고 말해, 군부가 타협을 통해 점진적으로 사태를 수습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벤메나세의 입을 빌린 군부의 이런 주장은, 미국에게는 화해를, 중국에게는 경고를, 수치 정부에게는 타협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그만큼 미얀마에 개입할 지렛대가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얀마 군부는 진압의 강도를 조절해 파국은 막아가며, 미-중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것으로 보인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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