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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DJ 권유로 정치 입문…민주당 시절 ‘정풍’ 주도

등록 2007-10-15 20:28수정 2007-10-15 21:14

정동영 누구인가
앵커서 정치인 변신…‘천·신·정’으로 개혁 각인
열린우리 창당 주도 당의장 두차례·장관 지내
방송 앵커, 여야를 넘나든 대변인, 두 차례의 집권 여당 의장과 통일부 장관.

15일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후보로 뽑힌 정동영 후보의 인생은 화려한 경력들로 채워져 있다. 말끔한 외모와 매끄러운 말솜씨는 그의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그는 안온함을 즐기는 온실 속 화초가 아니었다. 특유의 ‘당돌함’으로 기존 권력질서를 들이받으면서 커 온 풍운아가 그의 진면모에 더 가깝다.

■ 화려한 방송 앵커에서 정치인으로=정 후보는 휴전협정이 조인되던 1953년 7월27일 전북 순창 구림면에서 정진철과 이형옥의 8남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형 넷은 전쟁 중에 병사해 장남 아닌 장남이다. 아버지는 중소지주 집안의 장손으로 구림면장과 전북 도의원을 지냈다. 그의 순탄했던 인생은 고2 때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염세주의에 빠져 방황하던 사춘기를 거쳐 재수 끝에 1972년 서울대 문리대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반항정신은 이때부터 싹이 트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 문리대 선배인 이철(현 철도공사 사장), 친구 이해찬(경선후보·국회의원)이 주도한 유신독재 철폐 시위에 참가했다 붙잡혀 30일 구류를 살았다. 다음해에는 민청학련 가담 혐의로 3개월 투옥됐고, 석방 뒤 강제징집됐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후보가 지난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후보로 당선되자 함게 손을 맞잡아 들고 경선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정동영 후보가 1996년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해 당사에서 입당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동영 캠프 제공.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후보가 지난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후보로 당선되자 함게 손을 맞잡아 들고 경선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정동영 후보가 1996년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해 당사에서 입당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동영 캠프 제공.
1977년 복학한 정 후보는 다음해 <문화방송> 기자로 입사했다.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면접 때 유신독재를 비판했으나, 주위 사람들의 음덕으로 요행히 합격했다. 25살부터 43살까지 18년 동안 그는 ‘정동영 기자’, ‘정동영 특파원’, ‘정동영 앵커’로 불렸다. 정 후보는 10여초짜리 리포트를 위해 카메라 기자들의 원성을 살 정도로 촬영을 몇차례나 되풀이하는 등 집요한 기자였다고 한다. 그런 정 후보에게도 1980년 5·18 광주 민중항쟁 현장 취재를 보도하지 못했던 일은 기자 시절 뼈아팠던 경험으로 남는다. 그는 “광주항쟁의 일각을 기자로서 목격했으나,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었고, 5월은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정 후보가 처가될 쪽의 반대에 부닥치자 회사에 사표를 내고 연인 민혜경씨와 설악산으로 도망치는 소동을 벌인 끝에 결혼한 대목도 그의 ‘저지를 줄 아는 성격’의 한 사례로 꼽힌다.

■ 민주당 정풍운동 주도=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그에게 정치를 권했다.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은 사람이 이번 경선에서 맞붙은 이해찬 의원이다. 정 후보는 전주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됐고, 초선으로서 이례적으로 당 대변인을 맡았다. 그는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전국 최다 득표의 기록을 세웠고, 8월에는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에 당선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순탄한 정치행로를 즐기지 않았다. 그는 그해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직접 주재한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자리에서, 서슬퍼런 실세이자 정치 대선배인 권노갑 최고위원의 면전에서 2선 퇴진을 요구했다. 정 후보는 또 천정배·신기남 등 당내 초·재선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정풍운동’을 벌여 나갔다. ‘천·신·정’이란 별명을 얻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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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세를 몰아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이 ‘노풍’에 나가 떨어진 것과 달리 그는 경선을 끝까지 완주했다. 노무현 대통령 쪽에서 ‘이제 그만 끝내자’고 온갖 눈치를 줬지만 그는 굴하지 않는 집요함을 보였다.

■ 열린우리당 의장에서 탈당까지=노 대통령의 표현대로 정 후보는 “경쟁자에서 협력자”로 변했다. 첫번째 공동작업은 신당창당이었다. 그는 선두에 서서 2003년 11월 민주당 분당, 열린우리당 창당을 숨가쁘게 몰아갔고, 2004년 1월 열린우리당 초대 당의장으로 선출됐다. 새 당의 ‘최대 주주’가 된 것이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곧이어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그는 이른바 ‘노인 폄하’ 발언으로 비례대표 후보직을 사퇴하는 정치적 시련을 겪는다. 통일부 장관으로 화려하게 재기했으나 2006년 5월 당의장으로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한 뒤 참패의 책임을 지고 또다시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정 후보는 다시 한번 권력자와 충돌했다. 노 대통령과 갈등을 겪으며, 열린우리당 해체와 대통합신당 창당을 주장하며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것이다. 정 후보가 당내 권력과 맞설 때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따랐다. ‘불의에 맞서는 용감함’이라는 평가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권력투쟁’이라는 비판이다. 이제 대통령 후보가 된 정 후보는 더는 당내에서 맞서 싸울 상대가 없다. 그는 당내 최고 권력이 됐고, 적은 외부에 있다. 그에게 펼쳐진 새로운 시험대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정동영을 돕는 사람들
노사모 이끈 이상호씨 ‘정통(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지휘
이강래 캠프총괄·김현미 ‘입’ 노릇

‘원내 제1당의 대통령후보 정동영’을 만든 사람들은 몇개 그룹으로 나뉜다. 그룹의 특성에 따라 각각 맡은 구실도 달랐다.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펼친 그룹은 17대 총선 당시 정동영 후보가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 인연을 맺은 비례대표 의원들이다. 박명광 선대본부장, 민병두 전략기획위원장, 박영선 비서실장, 김현미 대변인 등이 순발력을 발휘하며 스피커 역할을 담당했다.

전북 출신 중에선 이강래 의원이 캠프를 총괄하며 당내 중진그룹과 가교 역할을 했다. 채수찬 의원은 정책의제 총괄을, 최규식 의원은 상황본부장을 각각 맡았다.

‘친노 그룹’에서 정 후보 쪽으로 옮긴 사람들도 중추적 구실을 했다. 염동연 의원은 특별한 직책을 맡지 않은 채 조직작업을 물밑 지원했다. 정청래 의원은 정 후보에게 유리한 경선규칙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초기 ‘노사모’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이상호 홍보기획단장은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을 지휘하며 지역경선을 정 후보의 압도적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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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 초반에 합류한 이용희 최고고문과, 문학진 선대본부장, 조성준 전 노사정위원장, 윤흥렬 전 스포츠서울 사장, 노웅래 대변인, 강창일 대외협력위원장 등도 역할을 했다.

실무 단위에서 경선을 주도한 사람들은 정 후보의 오랜 참모, 측근 그룹이었다. 이학로 조직단장, 황세곤 정무특보, 양기대 공보특보, 김현종 메시지특보, 김영근 공보특보, 이재경 전략기획실장, 정기남 공보실장, 이평수 수행실장 등이 꼽힌다.

정책 부문은 양형일 의원이 총괄했고, 권만학 경희대 교수와 류근관 서울대 교수의 활약이 눈에 띈다. 통일부 장관 시절부터 대북정책을 보좌해온 김연철 고려대 연구교수, 김동렬 전 재경부총리 보좌관, 임채원 서울대 연구원 등이 정책공약 생산을 측면 지원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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