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덴마크 쇠네르보르에서 열린 국제에너지기구(IEA) 컨퍼런스에 참석한 파티 비롤(가운데) IEA 집행이사. 비롤 집행이사는 이날 ‘에너지 효율화를 위한 긴급 행동의 가치’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하고 각국 정부에 에너지 위기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에너지 효율화에 더욱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지구촌에 과거 수십년 간 경험하지 못한 에너지 위기의 도래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가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최대의 에너지 위기에 직면에 있다며 각국 정부에 에너지의 효율적 이용을 통한 에너지 수요 절감과 수입 에너지 의존도 줄이기에 나서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IEA의 권고가 아니더라도 많은 나라가 에너지 수요 절감과 수입 에너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 대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의 중심인 독일은 물론 산유국인 미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런 흐름에서 한국은 예외인 듯 보입니다.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인데도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새 정부 출범 한 달이 지나도록 에너지 위기 대응에 초점을 맞춘 정부 차원의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부가 내놓은 대책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유류세 인하 정도입니다. 하지만 유가 급등에 따른 소비자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이 조처를 에너지 위기에 대한 근본 대책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유럽연합 국가들은 러시아산 화석 에너지에서 독립하기 위한 새 에너지원 확보에 사활을 걸다시피하고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최근 재생에너지를 늘리기 위해 풍력 발전기와 주거지역 사이의 이격거리 제한까지 유보하는 특단의 방안을 마련 중입니다.
이격거리는 풍력 발전기에서 발생하는 소음에 의한 주민 생활 피해를 막기 위해 필요합니다. 외신에 따르면 독일 경제기후부는 국토 면적의 2%를 육상 풍력발전 부지로 설정하는 것을 목표로 한 법안을 곧 의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국토 면적의 약 0.8% 정도로 설정된 풍력발전 부지를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해 이격거리가 문제가 되는 주에 한해 적용을 유보하겠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재생에너지를 늘리려고 70여년 전 한국전쟁 당시 만들어진 국방물자생산법(DPA)까지 꺼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태양광 발전 시설에 필요한 물자 조달을 위해 지난 6일 동남아산 태양광 패널에 대한 관세 면제 조처와 함께 국방물자생산법 발동을 발표했습니다. 대통령이 국가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물품을 생산기업의 손실 발생 여부와 무관하게 우선 조달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입니다.
바이든 정부는 화석 에너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2035년까지 전체 전력의 40%를 태양광으로 생산하는 목표를 내걸었습니다. 이 목표에 따라 빠르게 늘려가던 태양광 발전 시설이 관련 물자 공급난으로 차질을 빚자 국내 생산을 확대하기 위한 강력한 조처에 나선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에너지 위기 대응에 가장 빨리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것입니다. 에너지 이용을 효율화해 에너지 수요를 절감하는 것은 최근
덴마크에서 열린 IEA 컨퍼런스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유가와 전기요금 등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면 소비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에너지를 아껴쓰게 됩니다. 하지만 가격효과에 따른 자발적 절약만으로는 부족해 정부에서 소비 절약 캠페인을 펼치기도 합니다.
외신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최근 산업계와 소비자 단체 등과 함께 에너지 절약 캠페인을 시작했고, 일본에서는 얼마전 에너지 주무 장관이 언론에 나와 전기 절약을 호소했습니다. 일본에서 원전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높아진 안전기준 탓에 가동을 늘리기 쉽지 않습니다. 석탄발전소는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이어서 가동을 줄여 나가야 하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가스발전의 연료인 액화천연가스 조달마저 불안정해졌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원전이 일본보다 더 많이 가동되고 있다는 것만 다를 뿐 석탄과 가스발전소가 처해 있는 상황은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발전연료 가격 급등을 거의 반영하지 못한 전기요금 때문에 소비자들의 자발적 절전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결국 한국전력은 전기를 팔수록 적자가 늘어나는 상황이 빠져 있지만 절전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발전 연료가격이 급등했는데도 전기 소비는 오히려 늘었습니다. 한국전력의 전력통계월보 최신호를 보면 지난 4월 한전의 전기 판매량은 4만3758GWh(기가와트시)로 집계됐습니다. 지난해 같은 달(4만1900GWh)과 2020년 같은 달(4만475GWh)은 물론 코로나19 팬데믹이 오기 전인 2019년 4월(4만2441GWh)를 크게 앞지른 것입니다.
박일준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왼쪽 두번째)기 지난달 20일 취임 후 첫 현장방문지로 경남 창원시에 있는 원전 기자재 제작 업체인 두산에너빌리티 창원공장을 방문해 관계자들로부터 회사 운영현황과 애로사항을 듣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윤석열 정부가 출범해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에너지와 관련해 국민들이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은 탈원전 정책 철폐와 원자력 이용 확대일 것입니다. 하지만 탈원전과 원전 이용 확대가 IEA가 경고하는 임박한 에너지 위기의 대책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신규 원전 건설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최근 각광받는 소형모듈원전(SMR)은 아직 개발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연합이 원자력 에너지를 사실상 녹색에너지로 분류하면서도 최근 발등의 불이 된
에너지 위기를 맞아서는 재생에너지 확충에 더 기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사업계획부터 10년 가량 걸리는 원전과 달리 태양광 발전 시설의 경우 부지만 확보되면 몇 달만에도 설치돼 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는 에너지 담당 차관이 취임 뒤 첫 현장 방문지로 원전기업들을 선택하고 잇따라 원전 관련 보도자료를 내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원전기업과 원전수출 지원정책 추진 상황을 알리는 내용들입니다. 국민들은 원전 수출 가능성 못지 않게 세계적 에너지 위기에서 한국은 괜찮을지에 대해서도 궁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아직 설명자료 한 장 내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