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즈버러 독립조사위원회 이끈
필 스크레이턴 교수 인터뷰
영국 정부 사고사 발표 뒤 재조사
위법에 의한 죽음으로 최종 결론
“통제인력 없어 일어난 끔찍한 사고
좁은 공간관리 주체와 경찰 책임”
필 스크레이턴 교수 인터뷰
영국 정부 사고사 발표 뒤 재조사
위법에 의한 죽음으로 최종 결론
“통제인력 없어 일어난 끔찍한 사고
좁은 공간관리 주체와 경찰 책임”
97명이 압사한 힐즈버러 참사 발생 이틀 뒤인 1989년 4월 17일, 축구 팬들이 힐즈버러 경기장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헌화를 한 모습. AP 연합뉴스
힐즈버러 독립조사위원회 이끈 필 스크레이턴 교수. 본인 제공
지난 2012년 독립조사위가 발간한 힐즈버러 참사 보고서
■ 20년만의 재조사…2년간 관련 문서 2백만건 분석
힐즈버러 참사는 1989년 4월15일 영국 요크셔주 셰필드 카운티에 있는 힐즈버러 경기장에서 발생했다. 리버풀과 노팅햄포레스트 간 축구협회(FA)컵 준결승 경기 도중 리버풀 쪽 서측 입석에서 97명이 압사하고 760여명이 다쳤다.
당시 넉 달만에 이뤄진 정부 진상 조사에선 “경찰의 인파 통제 부족이 참사의 주요 원인”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이후 이뤄진 수사와 소송 과정에선 전혀 다른 결론이 나왔다. 경찰은 희생자들의 범죄이력을 조회하고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했다. 사인 조사에서도 팬들의 폭력적인 행동을 강조했다. 그 결과 힐즈버러 참사는 사고사로 결론지어졌다. 현장 관리 책임이 있던 남부요크셔 경찰과 셰필드 시청, 힐즈버러 경기장을 소유한 셰필드웬즈데이 구단 관계자 등은 모두 불기소 처리됐다.
이같은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족들은 지원 단체를 꾸려 줄기차게 재조사를 요구했다. 이들의 노력은 참사 20주년이던 2009년 결실을 맺는다. 당시 문화체육부 장관이던 앤디 번햄 주도로 노동당 정부는 정부 문서 30년 비공개 원칙을 깨고 힐즈버러 관련 문서 일체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정부 및 정당과 관련 없는 인파관리 전문가, 인권변호사, 탐사전문 기자 등으로 꾸려진 독립조사위원회가 2010년 출범해 문서 조사와 공개 과정을 주도했다. 필 스크레이턴 교수는 “판사가 이끄는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는 증인들에 대해 반대 심문을 하기 때문에 증인들이 편안하게 자기 얘기를 하기 어려워한다. 보다 풍부한 증언을 확보해 그 공통분모를 추려내는 방식으로 진실에 접근하려면 독립조사위를 꾸리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2010년 출범한 조사위는 2년간 정부, 경찰, 응급구조대, 소방청 등 80여개 관련 기관으로부터 힐즈버러 참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자료 2백만건을 받아내 분석했다. 여기에는 참사 당일 현장에 있던 경찰과 지휘부 간 무전 녹취록, 응급구조대원과 본부 무전 녹취록, 참사 발생 전 수년간 실시된 힐즈버러 경기장 안전진단 보고서, 관련기관들 간 각종 회의록 등이 포함됐다.
조사위는 최종 보고서에서 153개의 결론을 도출했다. 힐즈버러 참사는 하나의 기관이나 개인의 잘못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경찰의 잘못된 관행과 인식, 관련 기관의 안일함이 쌓여 발생했다는 것이다.
■ 결론 1. 경찰의 체계적 사전 대비 부족이 참사를 낳았다.
보고서는 같은 경기장에서 1981년에도 압사 사고가 벌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981년 열린 축구협회(FA)컵 준결승 경기에서도 힐즈버러 참사 때처럼 경기장 서쪽 입석에 관중이 몰리면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경찰은 축구장에서의 작전 계획에 압사 사고 예방 대책이나 대응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경찰의 관심은 오로지 거칠기로 악명 높은 리버풀 팬들의 경기장 난입과 다툼을 막는 데 쏠려 있었다. 관중에 대한 경찰의 이런 뿌리 깊은 부정적 인식은 압사 징후를 팬들 간 다툼이 벌어진 걸로 오인하게 만들어 구조 작업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경찰이 체계적 계획 없이 경험과 관행에 의존해 안전 관리를 했다는 점도 지적됐다. 힐즈버러에서 수년간 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있는 현장 지휘관은 입석 내 군중 숫자를 “눈대중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이 지휘관이 참사 몇 주 전 경험 없는 새 지휘관으로 교체되면서 안전 관리는 무너져내렸다. 대응 요령이 없는 상태에서 참사가 벌어지자 현장에 있던 경찰 지휘부는 허둥댔다. 참사 직후 경찰과 응급구조대 등의 무전 녹취록을 시간대별로 분석한 결과, 현장에 있던 경찰 지휘부는 이미 사망자와 부상자가 경기장으로 실려 나오는 상황에서도 중대 사건 대응 절차를 발동하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응급구조대원들은 경기가 중단된 뒤 15분이 지나서야 응급구조대 본부에 주요 사건이 벌어졌음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결국 응급구조대와 소방 등에 빠르게 지원 요청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부상자 분류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사상자가 늘었다.
■ 결론 2. 경기장의 구조적 결함과 허술한 안전진단이 피해를 키웠다.
힐즈버러 경기장을 소유·관리하는 구단 쪽은 늦어도 1979년부터 참사가 벌어진 경기장 서쪽 입석이 법률상 요구되는 안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
경기장 외부에서 입석으로 입장하기 위한 회전문이 7개뿐이어서 수만명의 관중이 입구에 몰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회전문을 늘리지 않았다. 입구에서 입석으로 이어지는 터널형 경사로가 법률상 기준보다 지나치게 가파르다는 지적도 간과했다. 입석과 경기장 사이 쳐진 철책에 난 대피용 출입문의 넓이도 법률상 최소 요건인 1.1m에 못 미치는 0.83∼0.85m 수준이었다.
1981년 압사 사고가 벌어질 뻔한 뒤 경찰이 서쪽 입석의 최대 수용 인원이 1만100명으로 너무 높게 설정되어 있다고 지적했지만, 구단은 이 지적도 무시했다. 보고서는 “구단과 안전진단 업체의 주요 관심사는 비용이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확인됐다”고 결론 내렸다.
■ 결론 3. 경찰이 불리한 증언을 체계적으로 삭제했다.
경찰은 참사 직후 별도의 티에프(TF)를 꾸려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경찰관들이 제출한 증언을 검토한 뒤 증언 내용 중 경찰 지휘부에 대해 불리한 내용은 수정하거나 삭제했다. 스크레이턴 교수는 “한 경찰관의 양심 고백으로 경찰이 체계적인 증거 조작을 벌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진술 원본과 경찰 상부에서 수기로 교정한 수정본, 그리고 수사기관과 조사위원회에 제출된 최종본을 내게 보여줬다”고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장 경찰관들의 진술 164건 중 116건이 이같은 수정을 거쳤다. “혼란스러운” “공포” “패닉” “혼란” 등의 단어는 삭제됐고, 경찰 지휘부가 어떤 지휘도 내리지 않았다는 고발 역시 삭제됐다.
보고서의 주요 집필자였던 스크레이턴 교수는 이같은 발견을 통해 드러난 가장 중요한 결론은 “힐즈버러 참사가 팬들 잘못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 “인파 통제보다 안전이 우선이라는 유산 남겨”
2012년 보고서가 발표됐을 때 파장은 컸다. 스크레이턴 교수는 “보고서 결과를 리버풀의 한 성당에서 유가족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발표했는데, 발표를 마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5분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후 생존자 단체를 대상으로 발표했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가 뒤늦게 이뤄졌으나 유죄 판결로 이어진 건 경기장 보건 안전 관리자 한 명뿐이었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박상은씨는 “법적 처벌에만 집중하면 인과관계가 직접 연결되어야 하다 보니 말단 관리자들만 처벌받게 된다. 조직 문화나 구조적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이 달라져도 참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그는 “힐즈버러 보고서는 구조적 원인을 앞세워서 참사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명확하게 짚어준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도 왜 여태껏 주최 없는 행사, 특히 핼러윈 인파 관리가 소홀하게 이뤄졌는지, 참사 전 신고 전화들이 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참사가 벌어진 공간의 구조적 위험성은 무엇이었는지 등이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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