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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산업·재계

가습기 참사·BMW 화재…이 법 없어 한국 소비자는 ‘봉’

등록 2020-11-19 04:59수정 2020-11-19 07:21

공정경제 3법 1일1법 파고들기
⑤전분야 집단소송·징벌배상제

현대기아차 엔진결함 발견되자
미국선 대규모 리콜·현금 보상
한국선 2년 지나 리콜 ‘차별’
집단소송제·징벌제 없기 때문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선 현대자동차 세타 엔진 결함이 왜 미국처럼 리콜(결함시정 조처) 대상이 안 되나요?”

지난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현대기아차 주요 차종에 탑재된 세타2 엔진 결함을 성토하는 글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대형사고가 날까 봐 내 돈으로 차량을 수리한다”며, 똑같은 엔진 결함인데 현대차의 태도가 국내와 미국에서 180도 다르다고 꼬집었다.

실제 현대기아차는 2015년 세타2 엔진 결함에 따른 주행 중 시동꺼짐 등 문제가 발생하자 미국에서 대규모 리콜조처를 했다. 비슷한 시기 같은 문제를 일으켰던 국내에선 2년 뒤에야 리콜이 진행됐다. 아울러 현대기아차는 미국 소비자들이 이 문제로 집단소송을 시작하자 지난해 미국에서 차량 417만대의 수리비 등 현금보상과 엔진 수리·교체 평생 보증을 합의했다. 국내에선 1년 뒤인 지난달에야 차량 52만대에 대한 보상조처가 발표됐다.

외국 기업들이 국내에서 한국 소비자를 차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2015년 독일 완성차업체 폴크스바겐은 ‘차량 배기가스 조작 사건이 불거지자 국내 소비자 27만명에게 100만원짜리 바우처를 한 장씩 주고 손을 털었다. 잘못에 대한 법적 배상도 아니었다. 2016년 미국 2천cc급 차량 소비자 47만5천여명에게 현금배상과 차량 수리·환매 비용 등 우리 돈으로 17조원 배상(배출가스 연구비용 2조2천억원 등 포함)을 합의한 것과 크게 대비된다.

지난해 국내에서 주행 중 차량화재가 잇따른 독일 기업 베엠베(BMW)가 보인 태도도 비슷하다. 당시 차량화재 원인은 배기가스 재순환 장치(EGR)의 기계적 결함으로 추정됐지만, 회사 쪽은 별다른 조처 없이 책임을 미뤘다. 이와 달리 베엠베는 같은 해 미국에서 자사 차량화재로 소비자 4명이 다치자, 곧바로 140여만대의 냉난방 시스템을 리콜했다.

1억400만건 정보유출에도 수천명만 10만원 배상

법무부가 추진 중인 집단소송법과 상법상 전면적 징벌배상제도가 미국처럼 국내에도 존재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집단소송제는 기업의 고의나 과실로 대규모 소비자피해가 발생했을 때, 50명 이상이 배상판결을 받으면 모든 피해자가 소송 없이 배상받도록 하는 제도다. 현재는 대규모 소비자피해에 기업 책임이 명백하더라도, 법정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 피해자들이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지난 2005년 증권 분야로 한정해 도입된 집단소송제(증권관련 집단소송법)를 이번에 모든 분야로 확대하는 집단소송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기업의 반사회적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액을 피해액의 최대 5배(현행 최대 3배)까지 ‘징벌적’으로 늘리고, 모든 분야에서 징벌배상 소송이 가능하도록 하는 상법 개정안도 입법 예고했다. 법무부는 “디젤차 배기가스 조작 사건 등을 보면, 집단소송제가 일반화된 미국과 특별법으로 도입된 독일에서 배상이 이뤄졌다”며 “국내에선 대규모 소비자피해가 발생해도 개별 (소송으로) 회복이 어려운 제도·현실적 한계를 개선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두 제도가 국회 문턱을 넘으면 국내에서 수백만 명의 피해자를 낳은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사건(2014년)을 비롯해 생리대유해물질사건(2017년), 라돈침대 피해사건(2018년) 같은 사건 재발 때, 다수 피해자들이 까다로운 소송 없이 배상받을 길이 열린다. 예를 들어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사건의 경우, 1억400만건의 정보유출로 경제활동인구 대부분이 피해자로 추정됐지만, 시민단체와 일부 법무법인이 추진한 소송에 참여한 수천명 피해자들만 길게는 6년 소송 끝에 각각 10만원가량을 배상받는 데 그쳤다.

특히 이번 집단소송법 제정안은 아직 소멸시효가 끝나지 않은 사건을 소급해 소송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사망자만 1만4천여명으로 추산되는 가습기살균제 사건(2011년)도 집단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 최근 장완익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국정감사에서 “사회적 참사에 집단소송 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법무부 “제도 도입 따른 기대실익 훨씬 클 것”

시민단체와 소비자단체들은 서둘러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나 베엠베(BMW) 연쇄 화재사고, 5세대(G) 이동통신서비스 불통문제 등 대규모 소비자피해가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집단소송법이나 징벌적손배제도 등 소비자권익법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기업이 잘못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온다. 김남근 변호사(참여연대 정책위원)는 “한국 경제가 과거 기업 중심 성장을 강조하면서 소비자는 후순위로 밀려났는데, 이제 소비자 권익을 최우선할 때가 됐다”며 “집단소송법과 전면적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구실을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선 소송 남발과 막대한 법무 비용이 사회적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란 주장이 끊임없이 나온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지난달 12일 정부에 낸 반대 의견서를 통해 “30대 그룹의 한해 소송비용이 현재 추정액(1조6500억)보다 6배 이상 많은 10조원가량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현행법상 행정제재와 형사처벌 규정을 적용받는데, 집단소송 등 민사적인 추가 처벌로 경영활동이 어려워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 상사법무과 관계자는 <한겨레>에 “집단소송은 본안 재판 전에 법원으로부터 엄격한 소송 허가를 받는 등 여러 여과장치가 있고, 집단소송을 청구하는 쪽도 대규모 인원의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비용과 과정이 만만치 않아 소송 남발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며 ”아울러 재계의 우려를 감안해도 제도 도입에 따른 기대 실익이 훨씬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국내 증권 분야에 집단소송제도가 도입된 뒤 15년간 소송까지 이어진 경우는 단 10건뿐이다.

홍석재 이재연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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